[양승득 칼럼]산업은행이 조원태 회장에게 건넨 사과

  • 등록 2020-11-27 오전 6:00:00

    수정 2020-11-27 오전 6:00:00

“생뚱맞다”고 생각했다. 대한항공이 빚더미 아시아나항공을 인수한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의 느낌은 그랬다. “제 코가 석 자인 데 무슨 수로 감당하려고?...” 매물 취급도 못 받는 회사를 제 앞가림도 어려운 동종 기업이 떠안아서 ‘무얼’ ‘어떻게’ 하겠다는 것이냐는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하지만 답은 ‘산업은행’이라는 돈줄을 끼워 넣자 곧 풀렸다. 산업은행→한진칼→대한항공→아시아나로 연결되는 출자 고리가 완성되고 그 의도가 읽혔기 때문이다.

산은-한진칼의 짝짓기는 항공업계 사상 최악의 경영난과 조원태 한진그룹 회장 등 오너 일가의 분란, 그리고 KCGI등 3자연합과의 경영권 분쟁 등 트리플 악재가 함께 얽히며 대한항공을 난기류 속으로 몰아넣은 데 1차 원인이 있다. 우호 지분을 합쳐도 3자 연합에 열세(41.4%:46.7%)를 면치 못하는 데다 코로나 직격탄까지 맞은 조 회장에게 산은이 먼저 내민 손길은 구원의 밧줄이었을 게 분명하다. 이동걸 산업은행 회장이 “재벌 특혜가 아니라 항공산업 특혜”라고 강조했어도 시장에선 산은이 조 회장의 백기사 역할을 했다는 평가가 상당한 게 그 증거다.

하지만 주목할 것 중 하나는 딜에 가려진 산은의 또 다른 얼굴이다. 금융 시장과 산업계에 비친 산은의 인상은 뒤치닥꺼리 전문의 금고지기에 가깝다. 부실기업에 쏟아 부은 산은 자금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여서다. 조선, 해운 등 대형 주력 산업에 탈이 나고 ‘폼’ 잡던 기업들이 거덜나면 어김없이 산은 돈이 수조원씩 수혈된 사실을 세상은 기억한다. 그런데 이처럼 판에 박힌 인상이 변화의 계기를 맞게 된 것이다. 산은이 ‘봉’이 아니라는 증거는 조 회장의 해임과 지분 처분권을 포함한 7중 경영 견제 장치를 투자합의서에 담은 데서 드러난다. 프로 장사꾼으로 변한 산은의 새 얼굴이다. 정치권에서는“특정 기업에 특혜를 주었다”고 비판하지만 대그룹 총수가 “ 쫓겨나도 좋다”고 서명하고 산은의 8000억원 투자를 받아들인 것이 특혜인지 아니면 자살골일지는 언젠가 가려질 일이다. 조 회장이 받아든 사과가 ‘독’ 아니면 ‘약’이 될 수 있는 시험이 시작된 셈이다.

짝짓기는 이제 첫발이다. KCGI가 제기한 한진칼의 신주발행금지 가처분신청 등 법정 싸움은 25일에야 심문을 시작했다. 공정거래위원회의 독·과점 심사도 큰 산이다. 노조의 반발과 직원 동요 또한 변수다. ‘엉터리 야합’이라는 비판과 특혜 시비 논란도 계속될 것이다. 물론 숫자만 놓고 보면 딱한 구석이 없지 않다. 우선 대한항공과 아시아나가 외부 지원 없이 순항할 수 있는가의 여부다. 두 회사의 부채는 34조원에 육박하고 1년 내 갚아야 할 돈만도 10조원에 이른다. 닫혀 있는 국제선 하늘은 언제 다시 열릴지 미지수다. 두 회사는 올해 각각 9155억원과 4305억원의 손실을 낼 것으로 보인다. 아시아나에 5조7000억원, 대한항공에 1조2000억원의 산은 돈이 지원된 상태에서 더 많은 국민 세금이 빨려 들어갈 수 있다.

하지만 눈여겨 볼 알맹이는 ‘국유화의 그림자’다. 산은은 딜 종료 후 한진칼 지분 10.66%를 확보한다. 국민연금(2.9%)를 합치면 범정부 지분이 13.56%다. 적대 세력을 빼면 사실상 2대 주주다. 조 회장을 해임할 수 있는 장치도 갖췄다. 국민연금은 대한항공 지분도 8.11%를 보유 중이다. 이런 각도에서 본다면 한진칼, 대한항공은 정부가 틀어쥐고 조종할 수 있는 기업으로 변할 수 있다. 민간 특유의 경쟁과 혁신 DNA도 사라질 수 있다는 얘기다. 결국 특혜 시비 논란에 가려진 또 하나의 뉴스는 ‘준 국유화의 문턱’일 수 있다. 때문에 대한항공이 스트롱 컴퍼니로 거듭나 이런 걱정을 씻어줄 수 있길 나는 바란다. 이래야 산업은행도 ‘프로 장사꾼’의 안목을 인정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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