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전시는 2018년 4월부터 지난 2월까지 국립현대미술관(MMCA, 서울)에서 열린 윤형근 회고전을 보강한 형태다. 포르투니 미술관장 다니엘라 페레티(Daniela Ferretti)가 지난 2018년 8월 MMCA 서울 ‘윤형근’전 개막식에 참석하여 전시를 관람한 후, 바르토메우 마리 전 국립현대미술관장과 협의하여 전격적으로 순회를 결정했다는 후문이다.
윤형근은 현재 전 세계 미술계가 주목하는 한국 단색화의 주역이며, 아트바젤 홍콩, KIAF 등 국내외 주요 아트페어는 물론 미술경매시장, 미술애호가들에게도 큰 사랑을 받고 있다. 이에 본고에서는 단색화의 거장이자 한국 현대미술의 깊이 있는 아름다움을 해외에 널리 알리고 있는 작가 윤형근의 삶과 예술세계를 살펴보면서 국내외 미술시장에서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이유를 밝히고자 한다.
1970년대 한국 미술의 주요 흐름, 단색조 평면회화
1970년대 한국 화단에 등장한 단색화(Dansaekhwa)는 단색조의 추상회화 중에서도 작가의 반복적 행위로 집단개성을 드러내는 일련의 유파를 지칭한다. 모노크롬 회화(Monochrome Painting)의 명칭이 ‘단색화‘라는 이름으로 통용되기 시작한 것은 2012년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본관에서 열린 ‘한국의 단색화전‘이 계기가 되었다. 단색화의 주요 특징은 환원성, 탈이미지와 평면성, 물성과 비물질성, 백색 모노톤, 동양적 정신주의 등이며 당시 활발히 활동했던 작가들의 작품에서 이들 특성을 발견할 수 있다.
정부 지원으로 개설된 ‘한국 미술 다국어 용어사전’에서는 표기 권고안과 더불어 Dansaekhwa의 다른 번역으로 Tansaekhwa와 Korean Monochrome Painting을 병기하고 있다. 또한 ‘관련 용어’로서 단색화에 해당하는 작가를 권영우, 김기린, 김환기, 박서보(본명 박재홍), 윤형근, 이우환, 정상화, 정창섭, 하종현으로 소개한다.
단색화의 거목, 윤형근의 생애
‘한국 단색화’의 대표적인 작가이자 김환기의 사위로도 잘 알려진 화가 윤형근의 작품들은 시공을 초월한 듯한 강력한 에너지를 담고 있다.
1928년 충청북도 청주에서 태어난 윤형근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등 참혹했던 시기에 청년기를 지냈다. 1941년 청주상업학교에 다니던 시절 전국 상업학교 학생 작품 포스터 전람회에서 입선하면서 점차 두각을 나타내었다. 졸업 이후 미술공부를 하기 위해 동경미술학교에 입학하고자 했지만,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폭과 2차 대전 막바지 상황으로 유학이 좌절된다. 미술공부에 대한 집안의 거센 반대에도 불구하고 서울로 올라온 그는 누나 집에서 생활하며 행상 등을 하여 등록금을 마련했다. 심지어 재료 살 돈이 없을 때는 버들가지를 태워 목탄으로 만들어 재생지에 그려가면서까지 미술에 대한 열정의 끈을 놓지 않았다.
윤형근은 1947년 서울대학교에 입학했으나 ‘국대안(국립대학교설립안) 반대’시위에 참가했다가 구류 조치 후 제적을 당하고, 이후 스승인 수화 김환기(1916~1974)에게 부탁하여 홍익대학교 회화과에 편입한다. 전쟁 중 피난을 가지 않고 서울에서 부역했다는 명목으로 1956년에는 6개월간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을 했다. 1960년 3월 22일 김환기의 장녀인 김영숙과 결혼한 그는 장인 김환기를 ‘아버지’라 부를 정도로 존경했고, 김환기도 윤형근을 ‘아들’처럼 여겼지만 동시에 이들은 각별한 사제지간이기도 했다.
젊은 시절 여러 번의 복역과 고난으로 좌절, 극도의 분노, 울분을 경험한 윤형근은 1973년, 그의 나이 만 45세에 비로소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형상화할 수 없는 것을 형상화하여 세운 독자적인 예술세계
윤형근의 예술세계를 화풍과 화법상의 변화에 초점을 두어 세분화하면, 제 1기인 1966년부터 1972년까지는 실험과 모색의 시기, 제 2기인 1973년부터 1981년까지는 다청 회화가 시작됨과 동시에 凹 凸(요철) 모양의 구조가 등장한 시기, 제 3기인 1982년부터 1992년 사이는 凹 凸 모양의 기본적 구도에 풍경적 스케일이 더해진 시기, 제 4기에 해당하는 1993년부터 2007년까지는 기존의 자유로운 번짐이 최대한 절제되고 강한 긴장감과 응축된 에너지가 절정에 다다른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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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기인 1973년부터 약 10년간은 서교동의 작은 공간에서 작품에만 몰두한 시기이다. 수화 김환기의 그늘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예술세계를 구축하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이다. 청년기부터 현실의 부조리, 모순, 혼란 등을 온몸으로 맞서며 살아낸 윤형근은 숙명여고 사건으로 서대문형무소에 다녀오면서 그간 맺힌 분노와 울분을 토해내게 되고, 어두운 사회 현실에 더욱 주목하게 된다. 이에 과거 작품에서 보이던 밝고 시원한 색채가 사라지고 청다색을 사용하여 전형적인 ‘검은’ 작품을 구현하게 된다. 초기에 세로로 길게 내려 그은 줄들도 굵은 막대기 형상으로 대범하게 변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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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상화할 수 없는 것을 형상화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것은 마치 허(虛)를 그 어떤 그릇 속에 가두어 두려는 것과 마찬가지 일인지도 모른다. 윤형근은 바로 그 불가능을 오래전부터 줄기차게 시도해 오고 있다.” - 이일. 「윤형근론」, 1989
이일이 윤형근의 개인전을 보고 카탈로그에 쓴 서문이다. 여기서 형상화할 수 없는 것은 특정한 이미지로 표현해 낼 수 없는 어떤 것을 뜻하는 것이며, 더 나아가서는 탈이미지화를 통해 작가 자신의 주관을 배제하고 근원적인 것으로 회귀하려는 자연의 원초적인 상태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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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 위의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 흙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생각하면, 모든 것이 시간의 문제이다. 나와 나의 그림도 그와 같이 될 것을 생각하면, 모든 것이 대수롭지 않다고 생각된다.”
“자연은 언제 보아도 소박하고 신선해서 아름답다. 나의 일(그림)도 그 자연과 같이 소박하고 신선한 세계를 담을 수 없을까? 그것은 어렵다. 안된다. 가령 그렇게 원한대로 된다하더라도 자연과 같이 언제 보아도 싫증나지 않는 그런 작품을 그리고 싶다.” - 윤형근
윤형근은 캔버스에 자연의 본성인 ‘스스로 그러함’의 세계를 담고자 했다. 나무가 썩어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자연의 순환원리에 큰 감명을 받은 그는 “내 그림에서 보여지는 형태는 흙덩어리라도 좋고, 썩은 나무토막이라도 좋다”고 언급하기도 하였다. 이에 윤형근의 회화를 색채와 자연이 합치되는 합자연(合自然)의 정신세계를 표현한 작업으로 이해해도 무방할 것이다.
국내·외 미술품 경매이력을 통해 본 윤형근 작품의 가격 추이
최근 전 세계적으로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단색화는 추상화 열풍과 맞물리면서 수요층이 확장되고 가격도 상승하는 추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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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생존 작가인 박서보, 이우환, 정상화에 비하면 작품 가격이 저평가된 것으로 판단된다. 이들의 작품은 10억 원대 이상 낙찰된 기록을 보유한 데 반해 윤형근의 작품은 50호 이상 크기의 작품들이 점당 1억~6억 원 수준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전문가들 역시 작고 작가라는 프리미엄과 적은 작품 수, 한국의 대표적 단색화가라는 점을 고려할 때 작품 가격의 추가 상승 여력이 있다고 설명한다.
전 세계 미술애호가들이 굴곡진 시대의 아픔을 담담하고 고고하게 표현한 윤형근의 작품을 감상하며 그의 숭고한 예술정신과 교감하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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