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비의 문화재 읽기]선조들은 역병 때 어떻게 명절을 보냈을까

한국국학진흥원, 조선 일기자료 공개
"역병 때는 차례 생략, 일상보다 조용히"
제사의 형식보다 정신이 더 중요
  • 등록 2020-09-28 오전 6:00:00

    수정 2020-09-28 오전 6:00:00

[이데일리 김은비 기자] 전국적으로 코로나19 확산세가 이어지면서 추석을 3일 앞두고도 고향에 내려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이 깊어졌다. 정부에서는 명절 연휴 기간을 코로나 특별방역기간으로 정하고 귀향을 자제해줄 것을 요청하고 나섰다.

이런 상황 속에서 지금보다 유교의 예를 강조했던 조선시대에 전국적으로 역병이 돌면 차례를 지내지 않았다는 기록이 공개돼 주목을 끌고 있다. 한국국학진흥원은 최근 760종의 소장 일기자료 중 역병 당시의 기록을 담은 일기 일부를 공개했다.

자료에 따르면 경북 예천에 살던 초간 권문해는 1582년 2월 15일 쓴 ‘초간일기’에서 “역병이 번지기 시작하자 차례를 행하지 못하니 몹시 미안했다”며 “나라 전체에 전염병이 유행하는 탓에 차례를 지내지 못해 조상님들께 송구스럽다”고 썼다. 이틀 뒤 작성한 일기에는 “증손자가 홍역에 걸려 아파하기 시작했다”는 내용도 덧붙였다.

안동 예안의 계암 김령 역시 1609년 5월 5일자 ‘계암일록’에서 “역병 때문에 단오 차례를 중단했다”고 했다. 앞서 5월 1일 일기에는 “홍역이 아주 가까운 곳까지 퍼졌다”고 적었다. 안동 하회마을의 류의목은 1798년 8월 14일자 ‘하와일록’에서 “마마(천연두)가 극성을 부려 마을에서 의논하여 추석에 제사를 지내지 않기로 정했다”고 기록했다. 안동 풍산의 김두흠은 1851년 3월 5일자 ‘일록’에서 “나라에 천연두가 창궐해 차례를 행하지 못하였다”고 썼다.

현종실록(1668년)에 따르면 “팔도에 전염병이 크게 퍼져 사람들이 많이 죽었는데 홍역과 천연두로 죽은 사람이 가장 많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처럼 조선시대에도 홍역과 천연두처럼 백성들의 일상에 지장을 주는 역병이 돌 때는 ‘거리두기’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계암일록(사진=한국국학진흥원)
김미영 한국국학진흥원 수석연구위원은 “예로부터 집안에서 상을 당하거나 환자가 생기는 등 우환이 닥쳤을 때는 차례는 물론 기제사도 지내지 않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고 말했다. 조상에게 음식을 대접하는 차례와 기제사는 정결한 상태에서 지내야 하는데 전염병에 의해 오염된 환경은 불결하다고 여긴 것이다. 여기에 역병이 돌 때는 차례를 비롯한 모든 집안 행사를 포기해 사람 간 접촉 기회를 최대한 줄이고자 했다.

이럴 때는 추석과 같은 명절도 음식을 만들지 않고 일상보다 더 조용히 보낸 것으로 추정된다. 김 수석연구위원은 “제례를 상당히 중시 여겼던 과거 역병이 돌아 차례를 생략하게 되면 산 사람들이 먹고 마시는 건 예에 어긋났다”며 “차례를 안 지내는 만큼 조용히 명절을 지냈던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실제 유교정신을 지금껏 이어가고 있는 전국 각지 종가에서도 문중회의를 거쳐 이번 명절에는 차례를 간소화해 지내고 타지에 있는 친척들은 오지 말 것을 결정했다. 안동에 있는 의성김씨 학봉종택은 명절이면 전국 각지에서 100여 명의 후손이 모이는데 올해는 마을에 있는 20~30명 규모로 명절을 지낼 예정이다. 특히 종가의 대를 이어갈 차종손도 타지에 살고 있을 경우 오지 말라고 했다. 김 수석연구위원은 “평소라면 종가에서 차종손이 명절에 참석하지 않는 건 굉장히 지탄받을 일이지만 특수한 상황에서는 오히려 자제하는 것이 예의”라고 말했다.

김 수석연구위원은 조상 제례의 행동 양식보다 본질을 따를 필요가 있다고도 조언했다. 그는 “유교적 가르침이나 행동양식에도 형식과 정신이 있다”며 “형식을 따르는 게 올바르다는 강박이 있는데 조상을 숭배하는 핵심을 알고 융통성 있게 운용하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하와일록(사진=한국국학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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