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일(현지시간) 열린 제 92회 아카데미 시상식.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각본상, 국제장편영화상, 감독상에 이어 작품상까지 수상하자 전 세계 영화인들이 환호했다. 작품상 수상 후 시상식 참가자들이 수상 소감을 더 듣겠다며 “업, 업(Up, Up)”을 연호하는 흔치 않은 장면이 연출됐다. 이미경 CJ그룹 부회장이 마이크를 건네받고 수상소감을 발표했다. 약 2분 동안 전해진 그의 수상소감. 봉준호 감독과 한국 관객, 동생인 이재현 CJ그룹 회장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이 부회장이 약 5년간의 공백을 깨고 한국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거물로 화려하게 복귀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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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충’이 한국 영화의 역사를 새로 쓴 배경에는 지난 5년간 한국에서는 볼 수 없었던 이 부회장의 물심양면 지원이 톡톡한 역할을 했다. 이 부회장은 영화 ‘광해’ 제작과 ‘변호인’ 투자 등으로 박근혜 정권 때 블랙리스트에 올라 2014년 미국으로 건너갔다. 이후 2015년 국내 그룹 경영 일선에서도 물러났다. 하지만 해외 엔터테인먼트 업계에서는 계속 활동을 해왔다. 2017년에는 아카데미상 투표권을 가진 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AMPAS) 회원이 됐다. 아카데미 수상을 목표로 진행한 ‘오스카 캠페인’ 과정에서도 이 부회장은 영화계 오피니언 리더를 대상으로 기생충에 대한 우호 여론 조성에 적극 나선 것으로 전해졌다. 이 부회장이 추진력있게 캠페인을 진행할 수 있었던 것은 CJ그룹의 재정적 지원이 뒷받침됐기 때문이다. CJ 그룹은 캠페인 기간 동안 100억원이 넘는 돈을 썼다는 후문이다.
당시 제일제당은 식품을 중심으로 한 기업이었다. 이 부회장은 제일제당이 그동안 국민들의 입을 즐겁게 해왔다면 앞으로는 눈과 귀를 즐겁게 해줄 비즈니스로 확장시켜 나가야 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었다.
이 부회장과 할리우드의 인연은 사실상 국내 영화계 최초의 글로벌 인맥이나 다름 없었다. 이 부회장은 이 인맥을 한국 영화업계 전체의 글로벌화를 위한 초석으로 활용했다. 할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들을 통해 세계 최고의 엔터테인먼트 업계 리더들이 감독, 배우 등 핵심 크리에이터들에게 어떻게 동기부여하고 지원하는지, 어떤 매니지먼트 시스템을 구축했는지 배웠다.
또한 할리우드 이너서클의 다양한 멤버들에게 틈만 나면 ‘한국에 이런 훌륭한 감독이 있다’며 우수한 감독을 알리는 데 열심이었다. 피플 비즈니스라는 문화 콘텐츠업의 특성상 감독, 배우, 콘텐츠를 할리우드의 이너서클에 알리는 일이 한국의 문화 콘텐츠 산업화의 중요한 인프라가 되기 때문이다. 모두가 문화 콘텐츠 산업을 업(業)으로 삼고, 문화산업의 글로벌화를 통해 한국 브랜드를 세계에 인식시켜야 한다는 이 부회장의 소명의식에서 나온 것이다.
할리우드 영화 제작 참여도
이 부회장은 직접 할리우드에서 영화 제작에 참여해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2007년 개봉한 ‘어거스트 러쉬’의 엔딩 크레딧에는 이 부회장의 영어 이름 ‘미키 리(Miky Lee)’가 제작자로 올라 있다. CJ엔터테인먼트는 이 작품의 기획단계에서 투자 참여를 결정했고 시나리오에 관한 의견을 공유하기도 했다.
이 부회장이 뚝심으로 밀어붙인 CJ그룹의 문화사업이 ‘기생충’으로 한국 영화계에 새로운 역사를 쓴 만큼 앞으로 다양한 K컬처 분야에서 어떤 성과가 나올지 더욱 기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