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모던보이 거닐던 '핫플', 커피향 품은 골목으로 변신

옛것과 새것이 공존하는 대구의 북성로
일제가 대구읍성 허물어 만든 길
전국 최대 공구골목으로 전성기 누려
IMF 이후 쇠락의 길 걸으며 사람떠나
미술관과 카페 들어서며 다시 활기차
  • 등록 2020-09-11 오전 7:43:44

    수정 2020-09-11 오전 8:46:05

스러져가는 건물과 좁은 골목으로 스산한 분위기가 나는 대구 북성로
[글·사진=이데일리 강경록 기자] 대구 북성로. 1906년 일제가 대구 읍성 북쪽 1.42km를 허물어 만든 길이다. 북성로는 그렇게 역사의 아픔 속에서 만들어졌다. 일제강점기에는 대구 최고의 번화가로, 광복 이후에는 사교와 문화의 거리로, 고도성장기였던 1970~80년대에는 전국 최대의 공구골목으로 전성기를 누렸다. 도면만 있으면 탱크도 만든다는 말이 생겨났을 정도. 자부심 대단했던 그 거리는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를 거치며 쇠락의 길을 걸었다. 그렇게 10여년이 흘렀다. 사람이 떠나간 그 거리에 다시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활기가 넘치고 있다. 스러져가던 건물에는 미술과 카페가 들어섰다. 을씨년스럽던 거리에 생긴 놀라운 변화였다.

스러져가는 건물과 좁은 골목으로 스산한 분위기가 나는 대구 북성로


일제강점기 대구 최고의 번화가였던 ‘북성로’

치욕의 시기였던 1905년. 대구는 자본을 들고 온 일본인들로 넘쳐났다. 대구역이 만들어진 후 역 주변으로는 역세권이 만들어졌고, 일본 자본가들은 성안으로 상권을 확장하려는 욕심을 부렸다. 결국 이듬해 대구읍성을 허물어 신작로를 만들었다. 당시 만들어졌던 거리가 바로 북성로였다.

1911년 2월 발행된 조선총독부 관보에 따르면 당시 북성로에는 백화점, 철물점, 양복점, 곡물 상회 등 일본인이 운영하는 다양한 가게가 있었다. 대구 최초의 엘리베이터로 유명했던 ‘미나카이 백화점’이 들어설 정도로 최대의 번화가로 군림했다. 하지만 100개가 넘는 상점 중 조선인이 운영하는 곳은 곡물가게 3곳에 불과했다. 북성로는 일제의 상징적인 수탈장소였던 셈이다.

일제강점기 내내 사람들로 북적였던 이 거리는 광복 이후에도 명성을 이어 나갔다. 일본인 상인들이 빠져나간 자리에 기계, 철물, 금속을 취급하는 상점이 속속 들어섰다.

스러져가는 건물과 좁은 골목으로 스산한 분위기가 나는 대구 북성로


한국전쟁 이후에는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폐공구를 수집해 팔던 상인이 북성로 서쪽의 달성공원 입구에서 장사를 시작했다. 당시 북성로 일대에 쏟아진 군수물자의 물량은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대구는 전쟁의 피해가 작았기에 전국에서 피란민까지 몰려들어 그야말로 물자와 사람으로 북적였다.

물자와 사람이 몰리는 곳에 문화와 예술이 따라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 피란 온 예술가들이 모인 대표적인 공간이 바로 다방과 음악감상실이다. 그랜드 피아노가 있어 원로 음악가들이 자주 찾았던 ‘백조다방’, 구상 시인의 출판기념회가 열렸던 ‘꽃자리다방’, 이중섭 화가가 담배 은박지에 소 그림을 그렸던 ‘백록다방’을 비롯해 ‘폐허에서 바흐의 음악이 들린다’는 내용으로 외신에 소개됐던 음악감상실 ‘르네상스’, 젊은 예술가들의 사랑을 받던 음악감상실 ‘녹향’은 아직도 북성로 골목을 걷다보면 발견할 수 있다.

여기에 구상 시인과 동화작가 마해송 같은 문인이 자주 이용한 것으로 유명한 ‘화월여관’, 이중섭 화가가 숙소로 사용했던 ‘경복여관’도 허름한 골목길에서 만날 수 있다. 일부는 폐허로 남아 사람의 발길이 뜸한 곳도 있고, 다른 상호로 바뀌어 운영 중인 곳도 있다. 비록 시대의 발전에 뒤처져 세월의 더께가 묻어있는 건물이지만, 그런 세월의 흔적을 되짚으며 걷는 것이 북성로가 간직한 진짜 매력이다.

북성로의 분위기있는 카페 모습


북성로에 불고 있는 변화의 바람

근현대의 역사를 거치며 화려한 시절을 보낸 북성로. 그러나 국내 최대의 공구골목이자 국내 최고의 기술자가 모여 있다는 자부심이 하늘을 찌르던 북성로 역시 역사의 굴곡을 피해가지 못했다. 섬유산업의 침체, 검단동 유통단지 조성, IMF 등을 거치며 자존심에 큰 타격을 입었다. 젊은 기술자가 떠나가고 찾아오는 사람들의 발길이 점차 줄어들었다. 이렇듯 쇠락의 길을 걷던 북성로에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변화의 물꼬를 튼 곳은 2011년 10월에 일제강점기 건축물의 외형을 간직한 채 문을 연 ‘카페 삼덕상회’였다. 당시 삼덕상회는 2대째 운영하던 와이어 철물점을 닫은 채 휴업 상태였다. 건물의 원형을 그대로 살려 카페로 재탄생시켰다. 역사를 간직한 공간을 토대로 새로운 활력을 만들겠다는 의도였다.

삼덕상회의 뒤를 이은 것이 ‘북성로 공구박물관’이다. 일제강점기에 미곡창고로 사용했던 일본식 건물. 이후 수차례 주인이 바뀌는 과정에서 건물은 많이 훼손됐다. 여러 차례 덧댄 시멘트를 30cm 가까이 들어낸 후에야 목재 마루와 다다미 바닥이 모습을 드러낼 정도였다. 이런 공간에 북성로에서 터를 일군 여러 공구상의 도움으로 공구박물관을 세웠다. 이제 공구박물관도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그 자리에는 북성로에서 가장 ‘핫’하다는 코이커피 카페가 들어서 있다.

일제강점기 치욕의 역사를 품은 순종황제어가길


논란의 중심에 선 ‘순종황제 어가길’도 북성로에 있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순종. 그가 1909년 전국 순행을 떠나 대구를 처음 방문한 것을 모티브로 만들어진 길이다. 순종이 다녀간 이 길에 쌈지공원을 만들고, 민족지사 양성소였던 우현서루 터와 국채보상운동의 발원지인 광문사 터(현 수창초등 후문 대성사 자리)에도 공원을 꾸몄다. 당시 순종은 대구를 시작으로 마산과 부산 등 남부 도시를 돌았다. 이 순행은 일제의 강요에 의한 것이었다. 독립을 지키려는 조선 의병들의 투쟁을 억누르고, 일제에 순종하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일제에 굴복한 비극적이고 굴욕적인 어가행렬이었다. 바둑판처럼 종횡으로 엮인 길 북성로. 시간을 흘러 과거의 모습은 많이 사라졌지만, 옛것과 새것이 함께 공존하며 색다른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리고 이곳에는 여전히 사람이 머물고, 모여들면서 자신만의 시간을 쌓아가고 있다.

근현대의 역사를 거치며 화려한 시절을 보낸 북성로에 자리한 코이커피 건물. 일제강점기에 미곡창고로 사용했던 일본식 건물로, 공구박물관으로 사용하다가 최근 북성로에서 가장 ‘핫’한 카페가 들어섰다.


여행메모

△가는길= 서울이나 부산 등에서는 대구까지 고속열차(KTX)를 타고 가는 게 가장 빠르고 편하다. 서울에서 버스를 탄다면 서울고속버스터미널에서 대구행 버스를 타면 3시간 30분 정도 걸린다. 자가용으로는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북대구IC로 나가면 갈 수 있다. 부산에서는 중앙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대구부산고속도로 수성IC에서 빠져나가면 된다.

△먹거리= 중구 동산동에 있는 성주 숯불갈비 식당, 소 생갈비 전문점이다. 갈빗살에 붙은 살코기를 떼어내 숯불에 구워 더 맛있는 갈비를 즐길 수 있다. 서구 내당 3동의 무침회 골목에는 이름난 무침회 식당이 여럿 있다. 그중 똘똘이 식당은 삶은 오징어와 우렁이, 무채, 미나리를 넣고 특제 양념과 버무려 옛맛을 느낄 수 있다. 여기에 납작만두와 함께 먹으면 매운맛을 중화시켜주고 고소한 맛은 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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