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빅파마의 영업이익율은 50% 내외, 순이익율은 약 20%로 그 어떤 산업보다 높으며, 향후 성장률 역시 GDP 성장률의 최소 4배인 6~10%이다. 그야말로 수익성과 성장성이 보장된 알짜배기 산업이다. 하지만 글로벌 빅파마 50위권(연매출 3조원)에 진입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실제로 SK바이오팜의 경우 1993년에 시작해서 27년간 총 1조원 내외를 투자한 결과 글로벌 시장진출에 성공했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본다면 1980~1990년 사이 미국에서 창업한 바이오의약기업 4000여개 중 300개 내외가 나스닥 상장에 성공했는데, 그중에서 6개 기업만이 2019년 기준 연매출 3조원을 넘기는데 성공했다. 상장업체수를 기준으로는 2%, 창업된 기업을 기준으로 본다면 0.1%에 불과하다. 게다가 가장 빨리 글로벌 빅파마 10위권에 진입한 암젠조차 10년만에 연매출 2조를 달성했고, 길리어드는 18년만에 연매출 2조원을 달성했다. 신약개발을 통해 글로벌 빅파마로 진입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다.
제약산업 환경이 이렇다보니 많은 사람들이 대기업 오너가 뚝심을 가지고 투자할 수 있었던 게 성공의 비결이며, 그렇기에 대기업 계열사인 SK바이오팜은 예외적인 경우라고 말한다. 일면 타당한 이야기다. 신약산업의 특성상 10년 이상 1조원 이상의 투자를 지속할 수 있는 자금동원 능력은 필수이다. 따라서 대기업의 전략적 투자지원이 없는 벤처기업들은 연구개발 활동에 진입하기 이전에 그보다 더 중요한 질문에 대한 답을 먼저 구해야 한다. 빅파마로 성장하기 위한 자본조달 전략은 무엇이며, 그에 적합한 비즈니스 모델은 무엇인지, 선택한 비즈니스 모델에 가장 적합한 연구개발 전략은 무엇인지에 대한 명확하고 일관된 전략이다.
이 당시 암젠의 연구개발투자비는 연간 300억원 내외였는데, 암젠은 애보트(Abbot), 업존(Upjhon)등과의 공동연구 협약을 통한 자본조달, 1985년 EPO 공동개발 및 판매를 위해 일본 기린(Kirin)사와 조인트벤처를 설립하는 방식으로 120억원 추가 자본조달에 성공했다. 개발에 착수한지 2년만에 Epogen 개발의 가능성과 그 시장성을 설득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그 결과 창업 후 5년만인 1986년에는 예산적자를 벗어나면서 720억원 규모의 유상증자에 성공한다. 또한 1989년 Epogen 시판허가 받은 것을 근거로 1990년 500억원 유상증자를 진행했고, 1992년 마침내 매출액 1조원을 달성하면서 본격적인 성장궤도에 올라섰다. 1992년 이후 암젠은 실적에 기반한 자본조달 능력을 바탕으로 공격적인 인수합병을 통해 시장출시에 필요한 파이프라인을 외부로부터 확보하는 동시에 항암과 면역질환 분야 항체 치료제 개발을 본격화하게 된다.
간단하게 살펴본 암젠의 사례로부터 배울 수 있는 시사점은 세가지 정도로 요약된다.
첫째, 타겟질환과 타겟 기술선택의 중요성이다. 1980년 바이오창업 열풍이 불던 시절 바이오의약 개발기술은 재조합단백질, 항체, 핵산, 유전자 치료제 등 적어도 4개 이상의 중요 기술들이 각축을 벌이고 있었고 대부분의 신생 바이오업체는 고기술 분야에 집중 투자했다. 신약개발에 필요한 기술수준이나 복잡성을 기준으로 본다면 재조합단백질 분야는 상대적으로 진입이 용이한 분야였는데, 암젠은 세계 최고 수준의 연구진을 보유했음에도 재조합단백질 기반의 적혈구성장인자(EPO) 개발전략에 집중했다. EPO 결핍질환의 경우 기존의 합성의약품으로는 공략이 어려운 질환으로 체외에서 인위적으로 만들어 넣어주는 방식 외에 다른 길은 없었다. 합성의약품 기반의 기존 빅파마들은 공략이 불가능한 반면 바이오의약 기술로는 상대적으로 쉽게 진입할 수 있고, 아예 시장이 존재하지 않기에 신생 업체라도 시장을 독점할 수 있는 질환을 선택한 것이다.
둘째, 증거와 실적 기반의 대규모 자본조달 전략의 중요성이다. 암젠은 1980년대 연간 300-500억원 정도의 연구개발 투자비를 조달함에 있어서 빅파마와의 공동연구, 파이프라인 기반의 조인트벤처 설립을 기반으로 유상증자하는 방식을 선택했다. 그 당시 미국 바이오기업의 주가는 현재 우리나라만큼은 아니지만 매우 높은 버블을 형성하고 있었다. 하지만 주가버블과는 별개로 대규모 유상증자는 미래에 대한 막연한 기대만으로는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암젠은 빅파마 공동연구를 통한 연구역량의 우수성 입증, 마케팅 조인트벤처 설립을 통한 Epogen의 상업적 가능성을 연달아 입증하면서 대규모 유상증자에 성공했고, 마침내 블록버스터 제품을 출시하는데 성공했다.
이와 관련 우리나라의 경우 바이오의약분야 VC 연간 투자액 1조원 시대에 기상장된 바이오제약기업들의 연간 유상증자 총액은 1300억원 내외에 불과한 이유가 무엇인지, 이 문제가 글로벌 바이오 제약기업으로 성장하는데 얼마나 심각한 장애물인지에 대해 혁신금융 관계자들이 관심을 기울여야만 한다.
셋째, 미국의 경우 1980년대 이후 5년 주기의 소규모 버블붕괴, 10년 주기의 대규모 버블붕괴를 경험하면서 바이오의약기업간 인수합병, 퇴출, 성장이 이루어졌다. 산업생태계의 진화가 활발하게 진행됐다는 의미다. 이에 반해 우리나라의 경우 2005년 황우석 사태에 따른 버블붕괴를 제외하고는 제대로된 버블붕괴를 경험하지 못했고, 이에 따른 제약산업 생태계의 진화를 이루지도 못했다. 그 결과 1990년대 창업열풍 후 20년이 지난 지금에도 매출액 1000억을 기록한 회사도 없고, 대규모 인수합병된 회사도 없으며, 상폐를 통해 퇴출된 기업 역시 극소수인 상태, 즉 고인물이 되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