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옹녀’에서 ‘아줌마’까지 역설적 섹시 코드의 팔색조 배우 원미경

  • 등록 2013-11-21 오후 6:39:22

    수정 2013-11-21 오후 6:39:22

티브이데일리 포토
[티브이데일리 제공] ‘시대의 아이콘’은 그 시대를 대표하거나 대중으로부터 가장 사랑받은 인물을 가리킨다. 1960년대 ‘여배우 아이콘’ 하면 윤정희 문희 남정임을 이른다. 이들은 ‘트로이카’로 불렸다. 70년대는 장미희 유지인 정윤희를 꼽는다. 그리고 80년대는 원미경 이미숙 이보희를 대표 여배우로 내세우는데 이견이 없다. 이 기준은 대체로 영화배우 활동을 근거로 한다. 90년대 이후 배우들의 활동이 TV드라마에서 보다 활발해지면서 더 이상 여배우 트로이카는 등장하지 않고 있다.

80년대 여성 트로이카 가운데 원미경은 ‘변강쇠’, ‘자녀목’, ‘물레야 물레야’ 등에서 가녀린 인상과 풍자의 섹시함을 과시했으며, 이미숙은 ‘뽕’, ‘고래사냥’, ‘겨울 나그네’ 등에서 다양한 연기를 소화하며 섹시함과 순수함을 표상했다. 주로 이장호 감독과 함께했던 이보희는 ‘어우동’, ‘바보선언’, ‘무릎과 무릎 사이’ 등에서 강렬한 섹시함을 보여주었다.

이들 3인방은 공교롭게도 각각 ‘변강쇠’, ‘뽕’, ‘어우동’이라는 토속 에로물에서 인기를 얻었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80년대의 여배우들은 당시의 정부 정책과 맞물려 섹시한 이미지를 보여주어야 했다. 정부의 검열은 폭력과 정부 비판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었지만, ‘야한’ 부분에서는 획기적일 만큼 개방적이었다. 이들에게 ‘뽕’, ‘변강쇠’, ‘어우동’ 등 당시를 대표하는, 그래서 다소 희화화되기도 했던 영화들이 자신들의 대표작이 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래서 이들은 ‘트로이카’보다는 ‘에로이카’로 불렸다.

이들은 치열하게 선두 다툼을 벌였는데, 아무래도 특정 감독(이장호)의 작품에 집중했던 이보희보다는 원미경 이미숙이 한발 앞섰다. 원미경 이미숙은 이때부터 90년대 안방극장을 관통하며 ‘영원한 라이벌’로 꼽혔다. 지금은 현역에서 잠정 은퇴한 원미경에 비해 이미숙이 앞섰다고 보이지만 데뷔 초 얼마간은 원미경이 더 인기가 있었다. 이 사실은 이미숙 본인이 일부 인정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원미경을 이겨야 한다”는 오기가 발동했다는 고백도 나왔다.

이미숙은 2011년 12월 SBS 토크쇼 ‘힐링캠프 기쁘지 아니한가’에 출연해 “78년 미스롯데선발대회 당시 1등을 예감했지만 강력한 또 다른 후보에게 1등을 내주고 인기상(5위)에 만족해야만 했다”고 술회했다. 대회 참가자 대부분이 학생 신분으로 수수한 메이크업이었던 것과 달리 화려하고 세련되었던 그 후보는 누구 하나의 이견도 없이 당당히 1위에 오르며 모두의 부러움을 샀는데 그가 바로 원미경이다. 당시 2위는 탤런트 김영철의 부인이기도 한 이문희이었다.

이미숙은 원미경에 한참 밀려 인기상을 받은데 대해 “인생에서 첫 번째 큰 쇼크였다. 내 감이 항상 맞는다고 생각했는데 그 감이 무너졌다. 원미경은 바로 연속극에 주연을 맡았다”라며 원미경을 바라보며 했던 다짐을 고백했다. “출발은 너보다 늦지만 더 우뚝 설 것이며 오래 할 거다”라고 결심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누구에게 ‘항복’ 선언을 하지 않았던 이미숙을 자극했을 만큼 원미경은 나름 카리스마를 지니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원미경은 후배들의 ‘따라하기’ 대상으로도 언제나 0순위였다. 명품 연기자였던 고 최진실이 살아생전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원미경 선배는 내 인생의 롤모델이다. 결혼 후에도 가정주부와 배우로서의 일을 모두 완벽히 해내는 프로의식을 보고 존경할 수밖에 없었다”라고 경외감을 보였을 정도이다.

강원도 춘천 출신인 원미경은 서울여고 3학년에 재학 중이던 1978년 ‘미스 롯데 선발대회’에서 1위에 입상하면서 연예계에 진출한다. 선발대회 수상과 함께 TBC(동양방송) 공채 탤런트 20기로 활동한다. 차화연, 이미숙, 이문희 등이 그와 탤런트 동기이다. 1960년생으로 이미숙, 송옥숙, 차화연, 이휘향, 임예진, 정애리, 최란 등이 그와 동갑나기 친구들이다. 이들 쥐띠 동갑나기들은 현재도 TV드라마에서 역량을 발휘하며 후배들로부터 ‘전설의 60년생’으로 불린다.

원미경의 TV드라마 데뷔는 TBC ‘파도여 말하라’를 통해서였고, 영화배우로서는 1979년 김수현 원작, 고 김기 감독의 ‘청춘의 덫’으로 데뷔한다. 이 영화는 서울 국도극장에서 개봉하여 20만 명에 육박하는 관객을 동원, 19살의 무명 신인배우를 단번에 스타덤에 올려놓는다. ‘청춘의 덫’으로 원미경은 그해 대종상에서 신인여우상을 받고, 데뷔 첫 해에만 4편의 영화에 주연을 맡았을 만큼 인기를 모았다.

영화에서의 수상경력도 화려하다. 대종상에 이어 80년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분 신인상을 받았고,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로’로 90년 청룡영화상, 91년 대종상에서 각각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스크린 정상을 딛는다.

그를 TV에서만 접한 세대에겐 뜻밖이겠지만, 80년대의 원미경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이대근과 함께 주연한 영화 ‘변강쇠’(1986, 엄종선 감독)에서 ‘옹녀’이다. 한번 걸려든 남자를 결국 죽게 만드는 ‘옹녀’ 역할은 20대 중반 원미경의 농염했던 이미지를 남성들의 뇌리에 각인시키기에 충분했다. 그 다음해에 만들어진 ‘변강쇠2’에서는 이대근 대신 연극배우 김진태와 콤비를 이뤄 더 많은 남자를 죽이는 ‘옹녀’로 열연을 보였다.

외모로 보면 원미경은 풍만한 몸매를 지닌 에로배우 이미지는 아니다. 작은 얼굴과 청순가련에 어울리는 슬림한 몸매를 지녔다. 한편으로 당차고 지적인 면모를 지니면서 맏며느리 혹은 조강지처의 이미지가 강했다. 그런 원미경이 ‘옹녀’로 인기를 얻었던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1980년 원미경 주연으로 ‘머저리들의 긴 겨울’이란 영화를 연출한 이성민 감독(현 아리랑문화재단 상임고문)은 “아마도 역설적으로 섹시함이 돋보였던 것 같다. 볼륨 큰 배우는 아니었지만 작은 얼굴에서 흘리는 미소, 무엇이든 빨아들일 듯한 매력적 눈매는 당시 남성들을 숨죽이게 만들었다”라고 말한다. ‘변강쇠’의 제작자였던 전 고려영화사(현 고려미디어) 박태환 대표는 “원미경은 아무리 덩치 큰 남자도 품에 안을 수 있는 마력 같은 걸 지니고 있는 여배우였다”라고 캐스팅 당시를 회고했다.

그래서일까. 원미경의 영화 출연작 41편 가운데 절반 정도가 에로티시즘을 내세운 것들이다. 제작자들은 이들 영화에서 원미경의 섹시 코드를 마케팅 포인트로 삼았다. 그가 주연한 미성년자불가 영화들의 포스터는 하나같이 성욕 정염 불륜 같은 유혹적 단어들로 채워졌다. 김호선 감독의 ‘밤의 찬가’ 포스터는 ‘오늘의 젊음이 겪어내는 육체와 정신의 할례식’, 고 김성수 감독의 ‘색깔있는 여자’는 ‘낮에는 흐느끼고, 밤에는 탄식하는 여체의 갈망’, 이영실 감독의 ‘반노’는 ‘예술이냐 외설이냐 화제 또 화제’, 엄종선 감독의 ‘사노’는 ‘조선조 사노들의 에로티시즘’을 메인 카피로 올렸다.

그의 섹시 코드는 북한에서도 통했다. 1980년대 대북전단(삐라)의 주제는 ‘자유’와 ‘섹시한 여성’코드였다. 여기에는 원피스 수영복 차림에 머리에 꽃을 꽂은 원미경이 등장한다. ‘88서울 올림픽 이전에 만들어진 이 대북전단은 현재도 강원도 고성 ‘DMZ박물관’에 가면 볼 수 있다.

‘에로여왕’으로 주목받으면서 스캔들도 뒤따랐다. ‘유부남 영화 관계자와의 열애설’, ‘권력기관에 의한 촬영 현장에서의 납치설’ 등이 한동안 대중의 입방아 올랐으나, 확인되지는 않았다. 그 가운데 가장 오랫동안 화제에 오른 스캔들은 연예기자 이모씨와의 동거설이다. 최근 연예기자 출신의 방송인 이상벽은 한 방송에 나와 ‘원미경 스캔들’의 당사자로 자신을 지목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전혀 근거 없는 루머라고 밝힌 바 있다.

관계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이 연예기자는 S주간지의 이모 사진기자로 알려졌다. 그들의 친밀한 사이는 당시 연예기자들 사이에서는 공공연하게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의 관계는 이모기자가 원미경을 스타모델로 삼아 사진 촬영을 전담하면서 생긴 오해에서 비롯된 것으로 밝혀졌다. 이 동거설은 원미경이 1987년 고 김종학 감독의 조연출이었던 MBC 이창순 PD와 결혼하면서 완전히 사라졌다.

1980년대 중반 무렵 원미경은 활동 주무대를 TV드라마로 옮긴다. ‘사랑의 종말’, ‘행복한 여자’, ‘도시의 얼굴’, ‘들국화’ 등의 많은 작품에 출연했다. MBC 드라마 ‘사랑과 진실’로 유명탤런트 반열에 오르고, 2000년 MBC 드라마 ‘아줌마’로 새천년의 시작과 함께 ''아줌마 열풍''을 몰고 왔다. 원미경은 이 드라마로 2000년 MBC연기대상, 2001년 백상예술대상에서 최우수연기상을 수상하면서 영화와 TV드라마 모두에서 정상에 서는 명품 연기자가 됐다.

원미경은 화장품 가전제품 제과류 의류 등 수많은 CF에도 출연했다. 그 중에서도 81년에 첫 전파를 탄 G초콜릿 광고가 대표적이다. 전영록과 함께 한 이 CF에서 해변가에 앉아 눈부신 햇살을 받으며 그리운 누군가를 기다리듯 설레는 표정으로 초콜릿 한 조각을 베어 무는 장면은 광고계의 전설로 통할만큼 유명하다.

원미경은 2002년 MBC 드라마 ‘고백’을 끝으로 홀연 연예계에서 모습을 감춘다. 그리고 2003년 남편 이창순 PD와 아들, 두 딸과 함께 미국으로 떠난다. 아이들 교육을 위해서였다. 특히 영화미술감독 수업을 받고 있는 큰딸 예린에 대한 기대가 각별하다. 미국에 장기 체류하게 됨에 따라 그는 현재 잠정 은퇴한 상태다. 아직 귀국 계획은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원미경은 한 지인을 통해 “지금도 국내 방송계로부터 러브콜을 받고 있지만 당분간 아이들의 교육에 전념하는 평범한 주부로 살아가는데 행복을 느낀다”라고 근황을 전했다. 워싱턴 D.C. 인근의 프리느 윌리엄 카운티라는 곳에 살고 있는 그는 “교회활동도 열심히 하고 있으며 바로 옆집에 친언니가 살고 있어 외로움을 적게 겪고 있다”라고 밝혔다.

이데일리
추천 뉴스by Taboola

당신을 위한
맞춤 뉴스by Dable

소셜 댓글

많이 본 뉴스

바이오 투자 길라잡이 팜이데일리

왼쪽 오른쪽

스무살의 설레임 스냅타임

왼쪽 오른쪽

재미에 지식을 더하다 영상+

왼쪽 오른쪽

두근두근 핫포토

  • 그림 같은 티샷
  • 홈런 신기록 달성
  • 꼼짝 마
  • 돌발 상황
왼쪽 오른쪽

04517 서울시 중구 통일로 92 케이지타워 18F, 19F 이데일리

대표전화 02-3772-0114 I 이메일 webmaster@edaily.co.krI 사업자번호 107-81-75795

등록번호 서울 아 00090 I 등록일자 2005.10.25 I 회장 곽재선 I 발행·편집인 이익원

ⓒ 이데일리.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