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범준의 소행성]50만원짜리 와인은 안 팔아도 그만이다?

⑤메뉴 속 '456법칙'과 상대적 만족성
  • 등록 2022-05-21 오후 1:00:00

    수정 2022-05-21 오후 1:00:00

소행성 B612에서 온 어린 왕자가 물었습니다. “길들인다는 게 뭐지?” 여우가 말했습니다. “관계를 맺는다는 뜻이야.” 인간은 자유로운 경제 활동을 하며 수많은 관계를 만들어 갑니다. 교과서에 따르면 가계는 재화와 서비스를 소비하고 기업은 생산을 한다는데 현실은 경계 없이 서로 복잡하게 뒤섞이죠. 소비자들에겐 선택의 권리가 있는 만큼 ‘소비자 행동’은 단순하게 길들일 순 없지만 이면에는 다양한 이유가 있습니다. 소비자 행동 특성에 관한 소소한 리포트와 취재 뒷이야기를 <소행성>이 전합니다.

▲사진은 기사와 직접 관계 없음.(사진=이미지투데이)
[이데일리 김범준 기자] 한 커플(지인 사이여도 좋다)이 와인에 기분을 내기 위해 한 와인바에 간다. 마침 그곳은 가격대가 덜 부담스러운 캐주얼 와인바. 메뉴판을 보니 와인 한 병에 저렴하게는 1만원대부터 최고가는 10만원 정도다. 특별히 원하는 와인이 있거나, 같은 값이면 양으로 승부를 보는 주당들이 아니라면 이 경우 대개 ‘적당한’ 3만~5만원대 와인을 고르는 경우가 많다.

그들이 다른 어떤 날에는 기념일이거나 각종 축하 자리, 혹은 별다른 이유 없이 취향에 따라 고급 레스토랑 또는 와인바에도 간다. 대개 매장 입구부터 분위기가 근사하고 왠지 교양을 챙겨야 할 것 같다. 메뉴판은 역시나 무겁다. 빠르게 스캔을 해보니 이 가게에서 가장 저렴한 와인이 이미 7만원은 넘고 비싸게는 수십만원, 때론 100만원을 훌쩍 넘는 곳도 있다. 이런 고급 와인바에 왔다는 으쓱한 기분과 함께 역시 ‘적당하게’ 10만~20만원짜리 와인을 주문해 분위기와 함께 취한다. 와인뿐 아니라 위스키와 샴페인 등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수십~수백억대 자산가 혹은 지독한 와인·위스키 애호가의 경우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보통의 근로소득자’들의 ‘보통의 날’이라면 대개 이러한 소비 행동을 보인다. 적당히 기분내기 생색을 위해 가장 저렴한 제품을 선택하기도, 그렇다고 잘 모르는데 가장 비싼 제품을 무턱대고 시키기엔 일종의 체면과 부담이 따르면서다. 그래서 가운데 가격대의 ‘중위값’을 선택하며 심리적 안정감 혹은 만족감을 얻는다는 분석이다.

이러한 경향은 최근 전 세계적 히트작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오징어 게임’ 속 한 장면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등장인물 참여자들이 유리 다리를 건너는 게임을 위해 순서를 정하는 조끼를 고를 때 중간 번호에 몰리며 선택한다. 이를 지켜보는 VIP들이 “역시 중간 번호가 제일 먼저 나간다” “위기의 순간에 중간을 선택하는 게 인간의 본능”이라고 해석한다. 정신과 전문의와 심리분석 전문가들도 동의하는 대목이다. 특히 가장 처음과 마지막 번호는 선택을 꺼리면서 일명 ‘456법칙’이라고도 한다. 1부터 9까지 나열한 숫자 중 가운데 숫자 3개가 4·5·6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러한 심리를 이용해 전략적으로 메뉴 리스트를 구성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어떤 10만원대 와인 제품을 주력으로 취급하며 판매를 원하는 매장이라면, 최저 가격 제품은 5~6만원부터 리스트업해 가격 차이가 크지 않다는 느낌을 준다. 또 주력 제품이 아니어도 일부러 50만원대 와인을 이 매장에서 가장 비싼 메뉴로 보여준다.

그러면 소비자들이 ‘50만원짜리 와인도 파는 고급 식당의 분위기와 서비스’라는 기대감과 함께, 10만원짜리 와인이 상대적으로 저렴하게 느껴지면서 심리적 ‘가격 저항력’이 약해지고 ‘합리적 소비’라는 만족감은 올라가면서 보다 선뜻 이를 선택하게 된다는 것이다.

서울에서 여러 바(bar)와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한 업주는 “각 매장 형태와 콘셉트에 맞춰 수급과 마진 등을 고려한 주력 주종과 특정 제품 판매 유도를 위해 메뉴 리스트업을 전략적으로 다르게 한다”면서 “메뉴 속 수십, 수백만원짜리 최고가 술은 일종의 전시품으로 ‘보여주기’에 가까워 안 팔아도 그만이고 실제 가끔 문의를 주셔도 매장에 없거나 단 1~2병 등 소량으로만 있는 경우가 많다”고 귀띔했다.

이러한 고민과 전략이 녹아 든 메뉴판 속 매트릭스(matrix). 잘 짜여진 각본이자 일종의 소믈리에(상황과 목적에 어울리는 와인 등 주류를 추천하는 사람)인 셈인 것이다. 대체로 매장마다 주력으로 내세우는 음식 혹은 술 메뉴가 파는 사람과 사는 사람 모두에게 만족도가 높은 편이다. 만약 불만족스러웠다면 불균형이 있다는 것이고 그 가게는 다시 가지 않으면 된다. ‘메뉴’는 업주가 짜지만 ‘선택’은 언제나 소비자에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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