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정병묵 기자] “고객의 평화로운 삶과 건강한 환경을 위해 성능과 가치를 모두 갖춘 전기차로 모든 고객이 안전하게 이용할 수 있는 친환경 이동수단을 구현하겠습니다. 세계 최고 수준의 수소연료전지 기술을, 자동차는 물론 다양한 분야에 활용하고 로보틱스와 도심항공교통(UAM), 스마트시티 같은 상상 속의 미래 모습을 더욱 빠르게 현실화시키겠습니다.”(2020년 10월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 취임사)
 | |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이 지난 3월 26일(현지시간) 미국 조지아주 ‘현대차그룹 메타플랜드 아메리카’ 준공식에서 연설하고 있다 (사진=현대차그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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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이 취임한 지 오는 14일로 5년이 된다. 지난 5년간 정 회장은 재게 3세 경영인 중 가장 성공적인 사례로 평가받아왔다. 정의선 체제 전환 후 현대차·기아는 글로벌 5위 브랜드에서 3위 브랜드로 자리매김했다. 취임사에서 밝힌 미래 청사진도 5년간 차질 없이 진행 중이다. 하지만 순항하던 ‘정의선 호’는 올해 글로벌 통상 위기와 중국 차의 급부상이라는 예기치 못한 폭풍을 만나며 가장 큰 위기를 헤쳐가고 있는 중이다.
2020년 10월 14일 현대차·기아차(현 기아)·현대모비스는 임시 이사회를 열고 정의선 현대차그룹 총괄 수석부회장의 회장 선임 안건을 의결했다. 1946년 현대차 최초 설립 이후, 2000년 현대차그룹 출범 20주년이 되는 해에 전격적으로 총수를 교체하고 3세 경영 시대를 시작한 것이다.
정 회장은 1999년 현대차(005380)에 입사해 2002년 현대차 전무, 2003년 기아차 부사장, 2005년 기아차 사장, 2009년 현대차 부회장을 역임했다. 2018년 9월부터는 그룹 총괄 수석부회장, 지난 3월 이사회 의장을 맡아 ‘정의선 시대’를 위한 기반을 차곡 차곡 다졌다. 고(故) 정주영 창업회장은 장손자를 식사자리에서부터 엄하게 교육시키면서도 “언젠가 중책을 맡을 것”이라며 총애했다고 전해진다.
정 회장은 글로벌 완성차 시장의 격변기, 현대차그룹을 세계 3위 제조사로 안착시켰다. 그가 취임하던 2020년 현대차·기아의 합산 판매량은 635만대로 토요타, 폭스바겐, 포드, 혼다에 이어 세계 5위권이었다. 이듬해인 2021년 현대차·기아는 글로벌 4위로, 2022년에는 3위에 올라 현재 이 자리를 굳게 수성 중이다. 지난해 영업이익에서는 판매 2위 폭스바겐을 제치고 2위를 차지했다. 현대차그룹은 올해 판매 목표를 739만대로 상향하며 미국, 유럽 등 선진 시장 판매량을 확대 중이다.
이 같은 현대차그룹의 수직 상승은 전기차 전환기, 정 회장의 과감하고 빠른 판단 때문이라는 평가다. 현대차그룹은 다양한 파워트레인을 동시에 추진하며 전기차뿐 아니라 하이브리드, 플러그인 하이브리드 등에 대응하면서 선진 시장에서 새로운 고객층을 사로잡았다. 현대차그룹 전용 전기차 플랫폼 ‘E-GMP’에 탑재된 동력시스템은 최근 미국 유력 자동차 전문지인 ‘워즈오토’가 선정한 최고 10대 엔진에 4년 연속 선정되며 세계 최고 수준의 전동화 기술력을 인정받았다.
질적 성장도 이뤘다. 현대차·기아는 선진 시장에서 ‘중저가 차’라는 이미지를 갖고 있었지만, ‘제네시스’ 브랜드를 명실상부 세계적 명차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럭셔리카로 자리매김했다. 글로벌 브랜드 도약을 위해 지난해 국내 대기업으로는 파격적으로 외국인 호세 무뇨스 사장을 현대차 최고경영자(CEO)로 선임하며 재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 | [이데일리 문승용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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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미국 최고 자동차 전문지 ‘오토모티브 뉴스’는 ‘정주영·정몽구·정의선 3대’ 경영진에게 ‘100주년 기념상’을 시상하며 “정의선 회장이 가문의 유산을 기반으로 현대차·기아·제네시스를 새로운 위상으로 도약시켰다”며 “글로벌 감각과 유연한 사고로 수직적 기업 문화를 탈피해 자유롭고 창의적인 조직 문화를 도입했으며, 글로벌 인재를 적극 영입하고 외국인 CEO를 임명하는 등 파격적인 인사 정책을 펼쳤다”고 호평했다.
정 회장은 취임 5년째인 올해 가장 큰 위기를 맞았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재선 후 올해 4월부터 부과된 25% 대미 자동차 수출관세는 현대차그룹의 이익을 분기당 수조원씩 갉아먹고 있다. 지난 3분기에 부담해야 할 관세 비용만 2조5000억원에 달한다. 그룹 차원에서 260억달러에 달하는 대미 투자를 약속하는 등 발 빠른 조치를 취했지만 국가 간 협상이 고착상태라 본질적인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다. 중국산 자동차의 급부상도 위협적이다.
정 회장은 올해 신년사를 통해 “우리가 당면한 상황이 여러 가지로 어렵지만 지금까지 위기가 아니었던 적이 없다”며 “과거에도 그랬듯 우리는 더 잘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정 회장은 연초 선언대로 복합 위기를 정면 돌파하는 중이다. 미국 시장에서 제품 가격을 동결하거나 역으로 보조금을 지급하면서 점유율 확대의 기회로 삼고 있다. 뿐만 아니라 아직 어떤 성과가 나올 지 알 수 없는 수소에너지, UAM, 로보틱스 등 미래 신사업에도 적극 투자하며 ‘십수년 이후’까지 내다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