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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문에 금융권의 대응도 산업계 지원에 맞춰져 있다. 당국이 국책금융기관들을 통해 6조7000억원의 지원 방안을 내놓은 게 대표적이다. 대출·보증의 일괄 만기 연장도 추진하기로 했다. 각 시중은행 역시 많게는 조 단위의 신규 대출을 완화된 기준으로 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당국·은행, 兆 단위 금융 지원책 줄줄이 발표
4일 금융권에 따르면 신용보증기금과 기술보증기금은 일본으로부터 수출 규제 피해를 입은 소재·부품 중소기업을 대상으로 1조6000억원의 특별보증 프로그램을 실시한다. 지난해부터 규제 품목을 수입·구매했거나 앞으로 예정된 기업이 대상이다. 보증비율 상향(85%→90% 이상)과 보증료율 인하(1.3%→1.0%) 등이 골자다.
은행권도 피해를 볼 수 있는 기업과 부실 우려가 있는 여신을 파악하느라 분주하다. 시중은행 한 고위관계자는 “부실 우려가 있을 때 여신을 축소하고 업종을 관리하는 게 정상이지만 지금은 그런 상황이 아니다”며 “갈등이 장기화해 산업 피해가 커지면 은행도 영향권에 들 수밖에 없다”고 했다.
실제 신한은행의 주채무계열 익스포저(원화대출·외화대출·유가증권·지급보증 등)를 보면, 현대자동차(연결 기준)의 경우 3월 기준으로 4조5150억원이다. 이어 삼성(4조2476억원), 롯데(3조1922억원), SK(2조9549억원), LG(2조72억원) 순이다. KB국민은행의 경우 현대자동차(4조9270억원), 삼성(3조7300억원), SK(2조3920억원) 등이다. KB국민은행의 여신을 산업별로 보면 제조업이 44조3365억원으로 전체의 33.5%다. 은행권 한 인사는 “대기업은 유동자금이 풍부해 대응력이 충분하다”며 “문제는 그 아래 1차·2차·3차 하청 제조기업들”이라고 했다.
이에 신한은행은 1조원 규모의 신규 대출을 지원하기로 했다. 업체당 10억원 이내다. 피해 기업 중 대출금 분할상환 기일이 도래할 경우 상환을 유예할 계획도 세웠다. KB국민은행도 긴급 경영안정자금을 통해 유동성 지원에 나선다. 피해 중소기업의 만기 도래 여신에 대해서는 상환을 유예하고 최대 2%포인트의 우대금리를 제공하기로 했다. 우리은행은 반도체·디스플레이 등 수출 규제 피해 산업의 협력사를 지원하기 위해 1조원 규모의 상생 대출을 지원하는 등 3조원 규모의 지원안을 발표했다. KEB하나은행도 피해기업과 그 임직원을 대상으로 금리 감면 등을 실시하기로 했다. 이번 대책을 위해 나온 지원 규모가 국책금융기관과 시중은행만 합쳐도 얼추 10조원이 넘는 셈이다.
문제는 갈등이 얼마나 길어질지, 대상 기업은 얼마나 될지 정확히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이세훈 금융위 금융정책국장은 “일본의 규제가 시행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리고 피해까지 시차가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며 “피해기업 규모를 예측하기 굉장히 어렵다”고 했다. 한국은행 금융안정 담당 부총재보를 지낸 강태수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도 “정확한 파장을 알기는 아직 이르다”면서도 “당국은 금융권에 어떤 영향이 있을지 세세하게 따져볼 의무가 있다”고 했다. 김상봉 한성대 경제학과 교수는 “한·일 전면전도 (미·중 갈등처럼) 예상보다 길어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며 “산업계 위기가 금융계로 전이될 위험을 주시해야 한다”고 했다. 최악의 경우 경제 펀더멘털에 이상이 생겨 은행권의 외화 조달금리가 급등할 위험도 있다.
“日, 직접 금융보복 가능성은 낮을 듯”
다만 금융권은 일본의 직접적인 보복 가능성은 낮다고 보고 있다. 명분도 실리도 없기 때문이다. 국제금융 사정에 밝은 한 전직 당국자는 “일본은 미국 등과 함께 국제금융 규범을 정하는 지위에 있다”며 “글로벌 연계성이 실물보다 더 높은 금융에서 특정 국가에 보복을 하는 건 제 살 깎아먹기”라고 했다. 일본은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주요 선진국(G10)이 모이는 바젤은행감독위원회에 참석한다.
강태수 선임연구위원은 “20여년 전 외환위기 당시 일본계 금융기관의 자금 회수로 자본이 유출됐던 때와 비교하면 지금은 (반복된 위기의 학습효과로) 위기 대응력이 완전히 달라졌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