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훈의 신경영 비전] 크리스퍼로 다가온 정밀 치료의 미래

  • 등록 2021-07-09 오전 11:30:16

    수정 2021-07-09 오전 11:30:16

[이상훈 전 두산 사장·물리학 박사]박테리아도 병에 걸린다. 파지라고 불리는 박테리아 바이러스가 질병의 원인이다. 파지 바이러스는 박테리아 세포 내에 파지 유전자를 주입하여 세포 내의 효소를 이용해 수많은 새로운 파지를 만들고 결국은 박테리아를 파괴하는 박테리아에게는 치명적인 질병원이다.

파지에 대항하기 위해 박테리아도 면역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박테리아는 단세포 생물이기 때문에 다세포 생물인 동식물처럼 복잡한 면역 시스템을 갖는 게 불가능하고 세포 안에서 필요한 면역 기능을 모두 수행해야 한다. 파지 바이러스에 대한 박테리아의 면역 시스템이 바로 크리스퍼와 카스9이다.

박테리아가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대부분의 박테리아는 죽지만 일부는 살아남는데 이들 살아남은 박테리아는 침범한 바이러스를 기억하기 위해 바이러스 DNA의 일부를 잘라 자신의 유전자에 삽입한다. 박테리아의 유전자에 삽입된 바이러스 DNA는 다음 세대에도 전달되고 세대를 거듭하면서 이 박테리아 ‘가문’에 침범한 바이러스의 DNA 정보는 모두 박테리아의 유전자에 차곡차곡 저장되게 된다. 이렇게 박테리아 유전자에 저장된 바이러스의 DNA 정보 기록이 바로 크리스퍼이다.

침범한 바이러스를 기억하는 것만으로는 효과적인 면역 시스템이 될 수 없다. 박테리아는 카스9이라는 특별한 단백질을 가지고 있는데 이 단백질은 크리스퍼가 저장하고 있는 바이러스의 DNA를 식별할 수 있는 RNA와 결합한 채 세포 내를 떠돌다가 RNA와 부합하는 DNA를 만나면 이를 잘라버리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한 번 이 박테리아 가문에 침범했던 바이러스가 다시 침범하면 이를 알아본 카스9 단백질이 바이러스의 DNA를 잘라버림으로써 무력화시키는 것이다.

이 원시 박테리아 면역 시스템이 현대 의학을 열광시킨 것은 바이러스 DNA뿐 아니라 어떤 DNA라도 카스9으로 정확하고 정밀하게 자르는 방법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자르고 싶은 DNA를 식별할 수 있는 가이드 RNA를 카스9 단백질과 결합시키기만 하면 정확하게 목표로 하는 DNA의 원하는 부분을 자를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공로로 미국 버클리 대학의 제니퍼 다우드나 교수와 독일 막스플랑크 연구소의 에마뉘엘 샤르팡티에 단장은 2020년 노벨 화학상을 수상했다.

크리스퍼의 발견과 함께 이를 활용한 멋진 신세계를 꿈꾸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유전자로 인한 각종 난치병의 치료는 물론 인간 태아의 유전자를 재단하여 두뇌와 외모와 건강을 두루 갖춘 수퍼 휴먼의 도래가 멀지 않았다는 추측도 나왔다. 실제로 2018년에는 중국의 한 연구원이 인간 태아의 유전자를 크리스퍼로 조작했다고 발표하여 세계적인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하지만 태아의 유전자 조작을 제외한 인간의 질병 치료를 위한 크리스퍼 기술의 활용은 아직 많은 기술상의 난제에 막혀있는 실정이다.

지금까지 크리스퍼 기술을 활용해 유전자 변형을 일으키려면 인체에서 세포를 추출하여 실험실에서 카스9 단백질로 유전자를 재단한 뒤 다시 인체에 주입하는 방법이 주로 사용되었는데 인체에서 유전자 재단이 필요한 문제의 세포만 골라 추출하는 것도 문제지만 유전자 재단을 한 뒤 세포를 다시 인체에 주입하여 원래의 기능을 수행하게 하는 것, 그리고 이상이 발생한 수많은 세포를 일일이 추출하여 유전자 재단을 하는 방법의 현실 가능성 등 극복해야 할 기술상의 문제가 산적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 크리스퍼 유전자 재단 방법의 발견으로 노벨상을 수상한 다우드나 교수가 설립한 인텔리아 세라퓨틱스사가 파트너인 리제너론 제약과 공동으로 혁신적인 크리스퍼 임상 실험 결과를 발표해 화제가 되고 있다. 이번 임상 실험은 간세포 이상으로 잘못된 단백질을 만들어 신경계와 심장에 문제를 일으키는 질병 치료를 목적으로 실행되었는데 기존의 방법과 달리 카스9 단백질과 가이드 RNA를 지질 나노입자에 넣어 혈관주사로 환자의 간에 전달시킨 것이다. 이렇게 간에 전달된 카스9 단백질이 문제의 단백질을 만들어내는 간세포의 DNA를 잘라 무력화시킴으로써 질병을 치료하게 된다. 아직 여섯 명의 환자에 대한 임상이 진행되었을 뿐이지만 기존의 방법을 훨씬 능가하는 치료 효과와 거의 부작용이 없는 임상 결과를 냈다. 더구나 최초로 세포를 인체 밖으로 추출하는 일 없이 인체 내에서 크리스퍼 유전자 재단을 통한 치료를 성공시켰다는 것이 이번 임상 발표가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있는 이유이다.

인텔리아는 이번에 발표한 임상 외에 유전성 혈관부종, 급성 골수성 백혈병, 당뇨병 등에 대한 크리스퍼 치료도 연구 중이라고 발표했고 임상 결과 발표 후 인텔리아사의 주가는 이틀 만에 70% 이상 급등하며 시장의 기대를 보여주고 있다.

이번 인텔리아 사의 임상 발표로 크리스퍼를 통한 유전자 레벨의 정밀 치료가 급속히 발전할 것으로 보인다. 유전자 레벨의 치료는 한 번의 투약으로 영구적인 효과를 낼 수 있기 때문에 기존 의료 체계를 뿌리째 흔들 폭발력이 있는 분야이다. 슈퍼 베이비 디자인이 아닌 질병 치료에서 들려온 크리스퍼의 희망적인 소식이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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