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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칼럼] 백신, 정책과 정치 사이

  • 등록 2020-12-31 오후 12:17:00

    수정 2020-12-31 오후 9:07:28

[이데일리 이정훈 기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대통령선거가 치러지기 석 달 전인 지난 8월에 식품의약국(FDA)을 압박해 아스트라제네카의 코로나19 백신에 대한 긴급사용승인을 조기에 내놓으라고 압박했다. 그리곤 한 달 지난 9월엔 50개 주(州)와 5대 대도시 지방자치단체장들에게 서한을 보내 대선 이틀 전인 11월1일까지 백신 접종 준비를 마치라고 요구했다.

지난 29일 경기도 평택 캠프 험프리스 내 브라이언 올굿 병원에서 주한미군 장병이 코로나19 백신 접종을 받고 있다. (사진=주한미군)


이 같은 트럼프 대통령의 `백신 정치`가 못 마땅했던 민주당은 대선 레이스 내내 “백선을 선거 도구로 삼지 말라”며 경고했지만, 정작 자신들이 낸 조 바이든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마자 입장을 180도 바꿔 “백신 접종을 빨리 시작해야 한다”며 되레 조바심을 냈다.

비슷한 시기였던 지난 9월 국회에 출석한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은 “전 국민의 60%까지 접종할 수 있는 백신 물량을 확보하는 중”이라며 “국민 절반 이상이 백신을 맞는 나라는 없으며, 이는 의학적으로 더 논쟁할 필요도 없다”며 노파심을 드러낸 의원들에 일침을 놨다. 더구나 몇몇 백신업체들이 성공적 임상 3상 결과를 내놓고 여러 국가들이 백신 확보 전쟁에 나선 11월에도 박 장관은 “백신회사들이 (오히려 우리더러) 빨리 계약을 맺자고 한다”며 백신 확보에서 결코 불리한 상황에 있지 않다며 여유를 보였다.

그러던 정부가 급해졌다. 선진국에서의 백신 접종이 시작되면서 국내 방역정책의 수장인 박 장관이 보인 느긋함에 불안을 느낀 국민들의 압박이 거세지자 돌연 태세를 변경했다. 허겁지겁 더 많은 백신을, 더 일찍 확보하겠다며 계획을 바꾸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전 국민이 한 번씩 맞고도 남는 양까지 계약물량을 더 늘리겠다고 했다. `야당과 언론이 왜 당장 백신을 구입하지 않느냐는 비판을 위한 비판에 몰두하면서 K-방역이라는 성공스토리를 망치고 있다`는 식의 여론전까지 불사하던 정부의 자신만만함은 오간 데 없다.

언제는 `백신 확보의 책임자는 복지부 장관과 질병관리청장`이라더니 이젠 급기야 문재인 대통령까지 나서 글로벌 제약사 최고경영자(CEO)와 통화하는 모습을 연출하며 백신 확보전에 직접 뛰어 들었다.

사실 `전 국민의 60%만 백신을 맞으면 된다`는 박능후 장관의 소신이나 `백신 확보 책임은 복지부와 질병청이다`는 청와대의 해석은 충분히 타당했다. 청와대도, 여당도 그 판단을 지지했다면, 불안해하는 국민을 안심시키고 반발하는 국민을 설득함으로써 관료와 전문가들이 소신있게 `백신 정책`을 견지해 나갈 수 있도록 바람막이가 돼줬어야 했다.

그러나 지금 국내 상황은, K-방역의 성과가 무너질까 초조해진 정치가 섣불리 개입함으로써 `백신 정책`을 `백신 정치`로 격하시키고 만 셈이다. 대선 캠페인 내내 혀를 차게 만들었던 미국의 광경이 재현되고 있음을 지켜보는 건 씁쓸하기 그지 없다.

국민들이 느끼는 코로나19에 대한 공포와 이를 잠재울 백신에 대한 기대를 자꾸만 정치적 이해득실로 따져 보는 정치인들의 셈법 탓에 우리의 `백신 정책`은 설 땅을 점점 잃어버리고 있다. 서둘러 백신 접종을 시작한 해외에서는 접종에 따른 부작용이 나오고 있다. 이를 두려워하는 국민들에게 어떻게 백신을 맞도록 유도할 것인지, 맞겠다는 국민들에게는 누구부터 어떤 순서로 접종을 하게 할 것인지 설득하고 합의하는 일이 오히려 정치의 몫이다. 미국에서 보듯이, 섣불리 백신 정책의 영역에 끼어든 정치가 이 역할을 제대로 해낼 수 있을 지 심히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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