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리뷰]정리해고 당한 아버지, 두 아들과 여행을 떠나다

국내 초연 연극 '듀랑고'
재미교포 작가 줄리아 조 희곡 무대화
경계인 시선으로 가족 의미 담아
  • 등록 2020-01-17 오전 11:22:19

    수정 2020-01-17 오전 11:22:19

[이데일리 장병호 기자] “내 친구들은 내 고향 코리아에서 엄청 유명해요. 대학총장도 있고요. 대통령 옆에서 일하는 친구도 있어요.” 20년 전 한국을 떠나 미국 애리조나 주에 정착한 50대 이부승이 힘차면서도 쓸쓸한 목소리로 말한다. 정년퇴직까지 4년을 남겨두고 있던 이부승은 방금 정리해고를 당한 참이다. 그의 앞에 놓인 것은 짐을 정리해둔 작은 상자 하나 뿐. 집으로 돌아와 두 아들 아이삭, 지미 앞에서 구겨진 자존심을 애써 감추려 하지만 표정은 그렇지 못하다.

10년 전 아내를 떠나보낸 부승은 두 아들만을 생각하며 회사를 다닌, 가족을 위해 모든 걸 바치는 전형적인 ‘한국 아버지’다. 부승이 두 아들 앞에서 자신이 정리해고를 당했다는 사실을 털어놓지 못하는 이유다. 그러나 비밀은 부승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가 그토록 믿고 있는 아이삭과 지미도 사실은 각자만의 비밀을 가족에게 숨기고 있다.

연극 ‘듀랑고’의 한 장면(사진=극단 TEAM돌).


가족은 무엇일까. 연극 ‘듀랑고’는 이 질문을 찬찬히 따라간다. 정리해고를 당한 부승이 두 아들과 함께 콜로라도 두랑고로 갑작스럽게 여행을 떠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가 100여 분간 무대 위에서 펼쳐진다. 콜로라도, 유타, 애리조나, 뉴멕시코 4개 주가 만나는 경계에 있는 두랑고는 증기기관차를 탈 수 있는 관광지로 유명한 곳. 이들의 여정은 두랑고라는 희망을 찾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들의 여행은 가족이라는 끈끈한 관계가 사실은 무척 허약한 구조로 지탱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의대를 나온 첫째 아이삭은 의사보다 기타에 더 관심이 많다. 부승의 전폭적인 지지 속에서 수영 챔피언이 된 둘째 지미는 사실 수영을 좋아하지 않는다. 여행길에서 이들은 부재한 아내와 엄마의 기억을 떠올리는데 그 기억마저도 하나로 일치하지 않는다. 극 후반부에 이르면 가족은 그 어떤 관계보다 쉽게 산산조각 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주말드라마에서 볼 법한 전형적인 한국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에게 “그래서 어쩌라고요?”라는 미국식 태도로 대하는 두 아들의 묘한 대비가 소소한 웃음을 만들어낸다. 가족을 향한 색다른 시선은 2017년 국립극단 연극 ‘가지’로 국내에 소개된 재미교포 2세 작가 줄리아 조의 것이다. 줄리아 조는 이번 작품에서도 한국문화와 미국문화 사이에 있는 경계인의 시선으로 가족의 의미를 바라본다.

“연극 ‘듀랑고’에는 커다란 메시지와 이슈, 담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안내 문구처럼 작품에는 이렇다 할 극적인 사건이 등장하지 않는다. 갈등으로 치달을 것 같았던 부승과 두 아들의 관계는 여행을 마친 뒤 언제 그랬냐는 듯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온다. 가족은 비밀을 굳이 공유하지 않더라도 함께 할 수 있는 존재라는 듯 말이다.

국내 초연인 ‘듀랑고’의 연출은 ‘가지’의 정승현 연출이 맡았다. 배우 이대연이 이부승 역을 맡아 열연을 펼치고, 박상훈과 허진이 아이삭과 지미 역으로 탄탄한 연기 호흡을 보여준다. ‘가지’에도 출연했던 중견배우 김대건이 제리와 네드 역을, 최지혜가 레드엔젤과 바바라 역으로 활기를 더한다. 오는 19일까지 서울 종로구 대학로 한양레퍼토리씨어터에서 공연한다.

연극 ‘듀랑고’의 한 장면(사진=극단 TEAM돌).
연극 ‘듀랑고’의 한 장면(사진=극단 TEAM돌).
연극 ‘듀랑고’의 한 장면(사진=극단 TEAM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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