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힘든게 뭔지 보여줄게"…간호사 '태움'은 계속 현재진행형

을지대병원 간호사 사망 2주…'욕설' 난무하는 병동
"선임이 인수인계 안 받아 밤샘"…'태움' 현재 진행형
"신고해도 안 바뀌어"…간호사들 영혼까지 태운다
"인력 부족이 고질적 원인…노동환경이 만든 타살"
  • 등록 2021-11-30 오후 4:10:34

    수정 2021-11-30 오후 9:26:50

[이데일리 이용성 기자] “네X 인수인계 안 들을 거니까 알아서 집 가라.”

7년 차 간호사인 조모(31)씨는 4년 전 일을 토씨 하나 빠지지 않고 기억한다. 오후 근무를 마치고 야간 근무자에게 인수인계 하는 시간이었다. 선임 간호사였던 야간 근무자는 다짜고짜 “인수인계 하지 마라”는 말만 툭 던지고 사라졌다. 이유도 없었다. 환자를 간호하기 위해선 환자 상태가 어떤지, 투약 된 약과 의료기기 세팅이 현재 어떤 상태인지 다음 근무자에게 전달해야 했다. 조씨는 환자가 혹시나 잘못될까 봐 퇴근할 수 없었다. 오후 10시 퇴근이었던 조씨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병동에 가만히 선 채로 다음 날 아침을 맞았다.

“뭘 쳐다봐, 눈깔 뭐야 당장 튀어와서 고개 숙이고 사과해!”

5년차 간호사인 20대 최모씨는 사실 쳐다본 것이 아니었다. 시선을 던진 곳에 선임 간호사가 공교롭게도 있던 것뿐이었다. 그렇지만, 최씨는 부리나케 달려가 고개를 숙였다. 다짜고짜 선임 간호사는 “수액 주사 넣고 왜 사인을 하지 않았냐”며 소리쳤다. 최씨는 방금 수액을 환자에게 놓고 오는 길이었지만, 다시 고개를 숙였다. 선임 간호사는 “지금 죄송하다고 할 시간에 중증 환자 처방 뜬 것 받아야 하지 않느냐”고 머리를 툭툭 쳤다. 돌이켜보면 최씨가 동시에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최씨는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숙였다. 이 모습을 동료 간호사들이 지켜봤다.

23일 경기 의정부시 을지대병원 앞에서 열린 민주노총 전국보건의료노동조합 기자회견에서 참석자들이 신규 간호사 사망 관련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촉구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사진=연합뉴스)
‘업무상 재해’ 인정됐지만 여전한 ‘태움’…“신고해도 안 바뀌어”

간호사들은 오늘도 태워진다. 여전히 영혼이 재가 될 때까지 태워 괴롭힌다는 의미의 ‘태움’은 직장 내 괴롭힘 중의 하나로 오래전부터 사회적 문제였지만, ‘문화’라는 이름으로 이어지고 있다. 지난 16일 경기 의정부시 을지대병원에서 일하던 새내기 간호사 A(23)씨가 병원 기숙사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취업한 지 9개월 만이었다. A씨의 지인은 “A씨가 평소 욕설과 폭언에 시달렸으며 밥도 못 먹고 밤샘 근무에 시달렸고, 볼펜이나 차트를 던져서 맞은 경험도 있다”는 취지로 증언했다.

처음에 책임을 회피했던 을지대병원은 여론이 악화하자 29일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무거운 책임을 통감한다. 조직문화를 개선해 악습의 고리를 끊겠다”며 “직원의 불편과 어려움 등을 주의 깊게 살피지 못한 점에 대해 깊이 반성하고 있다”고 고개를 숙였다.

‘태움’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지난 2018년 고(故) 박선욱 간호사·고 서지윤 간호사가 태움으로 고통받다 극단적 선택을 했다. 이후 근로복지공단이 이들의 죽음을 업무상 재해를 인정하기도 하는 등 ‘태움’은 이미 도마에 수차례 올랐다.

그러나 태움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응급병동에서 3년간 근무했다던 이모(26)씨는 “폭행을 동반하는 태움은 많이 사라졌다고는 하나 인격을 모독하고 정신적으로 압박하는 태움은 여전히 존재한다”고 밝혔다.

태움의 고리가 이어지는 이유에 대해 현직 간호사들은 신고할 수 없는 구조를 지적하기도 했다. 최씨는 “이미 윗선에 있는 선배들은 태우는 선임 간호사와 친해 신고해도 가볍게 넘어간다”며 “신고했다는 소식을 태움 가해자가 전해듣고 ‘진짜 힘든 게 뭔지 보여줄게’라고 더 괴롭힌 적도 있다”고 호소했다. 이씨도 “신고한다고 해도 아무것도 변한 것은 없고, 태움 가해자와 계속 보게 될 사람이기 때문에 선뜻 신고하기 쉽지 않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버티고, 피할 수밖에” 간호사들 눈물 호소…간호단체 “인력 부족이 원인”

결국 간호사들은 피하고 버티는 것밖에 답이 없다고 입을 모은다. 조씨는 “간호사들 커뮤니티에 들어가서 어느 병원 어느 병동이 태움으로 유명한지 먼저 찾아본다”며 “신고를 해도 바뀌는 것이 없으니 사람이 바뀌지 않으니 피하는 수밖에 없다”고 전했다. 최씨도 “태움을 일삼는 간호사와 근무가 겹치는 날이면 울며 겨자 먹기로 연차를 쓰며 버틴다”며 “한 달 근무표가 나오고 태운 사람과 겹치면 불면에 시달린다”고 호소했다.

시민사회계에서는 ‘간호 인력 부족’을 고질적인 문제로 짚었다. 인력이 부족해 간호사 한 사람에게 과중한 업무가 쏠리고, 당장 인력이 빠질 수 없어 가해자가 계속 근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골자다. 전국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는 지난 23일 의정부 을지대병원 앞에서 “신규 간호사의 교육훈련 문제, 과중한 노동과 장시간 근무, ‘태움’ 같은 조직문화 문제 등이 해결되지 못해 비극이 반복되고 있다”며 병원 측에 “진정한 사과와 가해자에 대한 처벌, 직무상 재해 인정, 인력확충 등 재발방지 대책을 마련하라”고 촉구했다.

건강권 실현을 위한 행동하는 간호사회 관계자는 “업무수행능력을 키운다는 명목으로 자행되는 폭력적인 조직문화는 자연스러웠고, 또한 병원의 안일한 대응은 신규 간호사에게 더는 벗어날 수 없는 아수라일 수밖에 없었다”며 “(의정부 을지대병원 사건은) 지금의 간호 노동환경이 만들어낸 구조적 타살”이라고 주장했다.

※우울감 등 말하기 어려운 고민으로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하면 자살 예방 핫라인 1577-0199, 희망의 전화 129, 생명의 전화 1588-9191, 청소년 전화 1388등에 전화하면 24시간 상담을 받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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