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70년대 중국에도 흙수저가 있었다

국내 초연 연극 '만약 내가 진짜라면'
中 작가 사예신 1979년 희곡 무대화
고위층 간부 사칭한 청년 실화 소재
권력 앞 인간의 현실 '웃프게' 그려
  • 등록 2020-06-02 오후 4:52:46

    수정 2020-06-02 오후 4:52:46

[이데일리 장병호 기자] 중국 문화대혁명 시기, 많은 지식 청년들이 상산하향(上山下鄕) 운동의 일환으로 농촌에 강제로 내려가 생활했다. 혁명이 끝나자 이들은 도시로 돌아가기를 원했지만 꿈은 쉽게 이뤄지지 않았다. 특권층 자제들이 인맥과 편법을 총동원해 도시로 돌아갈 기회를 먼저 차지했기 때문이다.

최근 서울 종로구 대학로 한양레퍼토리씨어터에서 막을 내린 연극 ‘만약 내가 진짜라면’은 요즘 흔히 말하는 ‘흙수저’와 ‘금수저’가 1970년대 중국에서도 존재했음을 보여줬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계급의 벽 앞에 놓인 사람들의 이야기가 안타깝게 다가왔다. 그렇다고 마냥 슬프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권력 앞에서는 거짓도 마다하지 않는 인간 군상의 모습이 그야말로 ‘웃프게’ 다가왔다.

연극 ‘만약 내가 진짜라면’의 한 장면(사진=서울연극협회, ⓒFotobee).


작품은 1970년대 중국에서 일어난 실화를 모티브로 삼고 있다. 어느 장군의 자제를 사칭한 스무 살 남짓한 청년에게 많은 사람들이 사기를 당한 사건이다. 중국 극작가 사예신이 직접 청년을 인터뷰해 1979년 발표한 희곡을 김재엽 연출이 이끄는 극단 드림플레이 테제21이 국내 초연으로 선보였다.

주인공은 상산하향 운동으로 농촌에 내려온 청년 리샤오장(김시유 분)이다. 리샤오장은 여자친구 저우밍화(권윤애 분)와의 결혼 약속을 지키기 위해 도시로 돌아가려고 하지만 특권층 자제들에게 기회를 번번이 빼앗긴다. 연극을 보기 위해서도 인맥과 편법으로 표를 구해야 하는 현실에 답답함을 느낀 그는 홧김에 고위간부 자제 ‘장샤오리’로 자신의 정체를 속인다.

과거 중국의 이야기지만 마치 지금 한국 사회를 보는 듯한 기시감이 든다. 권력 앞에서 갖가지 편법을 마다하지 않는 관료들의 모습이 그렇다. ‘고위간부 자제’의 등장에 관료들은 자신의 이익을 채우고자 온갖 사탕발림을 일삼는다. 점점 더 능수능란해지는 리샤오장의 거짓말과 이를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는 관료들이 웃음을 자아낸다. 그러나 리샤오장의 정체를 의심하던 우서기(지우 분)마저 리샤오장의 거짓말에 속고 마는 모습은 권력 앞에서 나약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현실을 보여주는 것 같아 씁쓸하다.

거짓은 오래 가지 못한다. 극은 리샤오장이 내세운 ‘장샤오리’의 정체가 드러나며 절정으로 치닫는다. 그러나 작품은 리샤오장에 대한 처벌 대신 그의 거짓말을 믿은 주변 사람들에게 비판의 화살을 돌린다. 리샤오장이 ‘흙수저’가 될 수밖에 없는 현실에 더 큰 문제가 있다는 시선이 강하게 드러난다.

극작가 사예신이 극 중 캐릭터로 등장하는 점이 독특하다. 작품에서 사예신은 적극적으로 극에 개입하는 화자 역할을 맡아 관객으로 하여금 1970년대 중국과 2020년대 한국을 비교하게 만든다. 원작은 1979년 중국에서 초연한 뒤 곧바로 중국 정부로부터 공연 금지 조치를 받았다. 그렇게 무대에서 사라졌던 리샤오장은 40여 년이 지나 한국에서 다시 부활해 지금도 변함없는 권력과 특권의 문제를 곱씹어보게 만들었다. 제41회 서울연극제 공식 선정작으로 신인연기상(유종연), 무대예술상(오수현 의상디자이너)을 수상했다.

연극 ‘만약 내가 진짜라면’의 한 장면(사진=서울연극협회, ⓒFotob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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