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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이윤정 기자] “시상식장에 번역자와 저만 아시아인이었어요. 수상자로 제 이름을 불렀을 때 너무 놀라서 ‘현실이 아닌가보다’ 생각했어요.”
아시아인 여성 최초로 캐나다의 권위 있는 문학상인 ‘그리핀 시 문학상(Griffin Poetry Prize)’을 수상한 김혜순(64) 시인이 벅찬 수상소감을 밝혔다. 김 시인은 25일 서울 중구 달개비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문학상 파이널리스트가 시상식장에 도착하면 무조건 1만불을 준다고 해서 캐나다에 갔다”며 “수상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고, 번역자도 ‘우리는 동양인에다 여자라서 절대 상 못받는다’고 축제나 즐기자고 했었다”고 당시의 상황을 전했다.
김 시인은 2016년 출간한 ‘죽음의 자서전’으로 인터내셔널 부문에서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세월호 참사와 계속되는 사회적 죽음들에 대한 49편의 시를 수록한 시집이다. 김 시인은 “‘죽음의 자서전’은 죽은자의 자서전이 아니라 산 자의 죽음에 관한 자서전”이라며 “심사위원들도 죽음과 같은 순간에 처했을 때가 있었을테니 시적 감수성이 그들의 감수성에도 닿지 않았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리핀 시 문학상’은 캐나다의 그리핀 트러스트가 주관하는 국제적인 시 문학상이다. 번역 시집을 포함해 전년도에 영어로 출간된 시집을 대상으로, 매년 캐나다와 인터내셔널 부문 각 한 명의 시인을 선정해 시상한다. 상금은 각 6만5000달러(한화 약 5천750만원)다. 노벨문학상 수상 가능성이 거론된 고은 시인이 2008년 공로상을 받은 적은 있지만, 본상 수상은 김 시인이 처음이다.
그는 현존하는 한국 현대 여성 시인 중 가장 많은 언어로 번역되고 소개된 시인이기도 하다. ‘슬픔치약 거울크림’ 영문판 시집은 2019년 ‘펜 아메리카 문학상’ 번역 시 부문 최종 후보에 올랐고, ‘죽음의 자서전’의 영문판은 2019년 미국 최우수번역도서상 최종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문학계에서 ‘아시아권 시인으로는 노벨문학상에 가장 근접한 시인’으로 평가하는 의견에 대해 김 시인은 “그런 이야기는 제발 하지 말아달라”며 “시인과 소설가들에게 그만 쓰라고 하는 말과 같다”고 손사래를 쳤다.
이번 상은 시집을 영문으로 번역한 최돈미 번역자와 김 시인이 공동 수상했다. 번역 작품의 경우 상금은 원작 작가(40%)와 번역 작가(60%)가 각각 나눠서 받는다. 2000년대 초반 최 씨가 먼저 찾아와 시인의 시를 번역하고 싶다고 요청하면서 인연이 시작됐다고 한다. 김 시인은 “문장의 주어가 무엇인지부터 사소한 개인사까지도 서로 소통하며 작업을 했다”며 “영어로 번역된 시집에 주는 상이기 때문에 번역자에게 더 많은 상금을 주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고 공을 돌렸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자신들이 아시아인이라는 것, 짐승이라는 것, 결국엔 여성이라는 것을 제일 모르는 것 같다. ‘페미니즘’이 시와 만나면 어떤 모습일까 하는 생각에서 ‘여자짐승아시아하기’를 쓰게 됐다. 옛날에 쓴 건 굳이 다시 들춰보지 않고 시간 속에 파묻고 지나간다. 당면한 한국 사회의 문제들 속에서 사유하며 그렇게 시를 써나가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