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성도 사죄도 없이 ‘전두환’ 떠나다

육사 졸업 후 정치군인 길…12·12, 5·17로 권력 장악
퇴임 후 백담사 유배…문민정부서 사형 선고
광주민주화 유혈진압 진실 끝내 안밝혀
경제성장·스포츠 발전 두고도 비판론 거세
  • 등록 2021-11-23 오후 6:33:10

    수정 2021-11-23 오후 10:17:43

[이데일리 박태진 기자] 전두환 전 대통령이 23일 역사에 씻을 수 없는 과오와 상처를 남기고 생을 마감했다. 12·12 군사 쿠데타, 5·18 광주민주화운동 유혈 진압에 대한 재판과정에서 반성도 사죄도 없었다. 특히 광주 유혈 진압 때 발포지시 여부에 대해 끝까지 함구하면서 진실은 묻혔다. 결국 현대사에선 ‘대통령 전두환’이 아닌 민주주의를 짓밟고, 역사의 단죄를 받은 ‘정치군인’으로만 남게 됐다.

(그래픽=문승용 기자)
하나회 결성…10·26 사태로 권련 야욕 드러내

그의 일대기는 권력 야욕으로 가득 찼다. 1931년 1월 18일 경남 합천군 율곡면 내천리에서 태어난 그는 대구공고를 졸업한 뒤 1951년 육사(11기)에 들어가면서 엘리트 군인 코스를 밟았다. 1955년 소위로 임관한 그는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실 민원비서관, 중앙정보부 인사과장, 제1공수특전단장을 거치는 등 출세 가도를 달렸다. 1958년 육군 장군이었던 이규동 씨의 차녀 이순자 씨와 결혼했다.

영남 출신 육사 동기와 후배를 중심으로 군내 사조직인 ‘하나회’ 결성을 주도한 그는 1976년 대통령경호실 차장보로 박정희 대통령을 보좌하며 권력 중심에 다가서게 된다. 1979년 3월 보안사령관에 오른 그는 그해 10월 26일 박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흉탄에 서거하자 권력 야욕을 본격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한다. 10·26 사태 합동수사본부장이 된 그는 각종 월권행위로 군내 비판이 일면서 교체 위기에 몰리자 하나회 장교들과 군사 반란을 도모했다.

그는 당시 최규하 대통령의 재가도 받지 않은 채 내란 방조 혐의로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강제 연행하고 전방 육군 병력을 서울로 출동시켜 군 지휘체계를 무너트리는 하극상을 저질렀다. 이듬해인 1980년 5월 17일 최규하 대통령을 겁박해 비상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하면서 김영삼·김대중·김종필 등 3김(金)을 정치규제로 묶고 권력을 한 번에 장악했다.

5·17 조치 다음날 광주 시민들은 민주주의 복원을 외치며 거리에 몰려나와 저항했으나 신군부는 공수부대를 투입, 유혈 진압을 감행하며 현대사 최대의 비극을 낳았다.

이후 그는 1980년 6월 초헌법적 기구인 국가 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발족시킨 데 이어 국회를 해산시켰다. 같은 해 8월 16일 최규하 대통령을 하야시킨 뒤 그해 유신헌법에서 만든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제11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7년 독재 후 육사 동기생에 정권 이양

그는 7년 독재를 일삼은 후에는 영욕의 연속을 보냈다. 5공 헌법을 만들고 1981년 제12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그는 언론 통폐합 조치와 보도지침을 통해 언론에 재갈을 물렸고, 학원가에는 안기부와 보안사 요원들을 풀어 학생들을 감시했다. 야당 인사와 학생들은 친북 용공 혐의가 씌워져 모진 고문을 당했고, 기업인들을 겁박해 통치자금을 조성해 부정축재를 일삼았다.

집권 당시인 1987년 1월에는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도 발생했다. 당시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말로 덮으려 한 경찰의 발표는 6월 항쟁이라는 국민적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회고록 등에서 경제성장 기조 유지, 1988년 서울 하계올림픽을 유치 등을 치적으로 삼았다. 하지만 경제성장을 두고는 “박정희가 차려놓은 밥상 위의 밥을 먹은 것”이라는 지적이 나왔다. 스포츠와 영화 등의 발전에 공을 들였다는 평가에 대해서는 이른바 ‘3S(스포츠·섹스·스크린) 정권’이란 말이 생겼을 정도로 문화·스포츠를 정치적 무관심을 유도해 민주화 열망을 꺾는 도구로 이용했다는 비판도 적지 않다.

그는 직선제 개헌을 수용한 6·29 선언으로 육사 동기생인 노태우 민정당 후보에게 정권을 이양했다. 그러나 퇴임 한 달 만에 동생 전경환씨가 비리 혐의로 구속되는 등 ‘5공 청산’ 분위기에 위기를 맞았다. 결국 1988년 11월 재임 기간 과오와 비리에 대해 국민에게 사과하고, 정치자금 139억원과 개인재산 23억원 등 재산을 헌납한 뒤 부인과 함께 강원도 백담사 유배 길에 올랐다. 백담사로 향한 11월 23일은 공교롭게도 그가 숨진 날이기도 하다.

1990년 12월 백담사에서 연희동 자택으로 돌아왔지만 그를 기다리던 것은 역사의 단죄였다. 문민정부를 연 김영삼 전 대통령의 하나회 해체와 12·12, 5·18 진상규명 및 관련자 처벌 등 과거사 청산 조치에 따라 심판대에 오르게 된 것이다. 1995년 12월 내란죄 혐의로 검찰의 출두 통보를 받은 그는 연희동 자택 앞에서 “검찰 수사에 협조하지 않겠다”는 ‘골목길 성명’을 발표하고 고향 합천으로 내려가 국민의 공분을 자아냈다. 하지만 곧바로 사전구속영장이 집행돼 압송됐고, 1심에서 사형, 2심에서 무기징역과 추징금 2205억원을 선고받았다.

그는 김대중 국민회의 후보가 승리한 1997년 12월 대선 직후 김영삼 대통령의 특별사면 조치로 구속 2년 만에 풀려났지만 이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진정성 있는 반성을 하지 않았다.

그는 수많은 논란의 어록도 남겼다. 그는 ‘5·18 피고인’으로 처벌받은 후인 2003년에도 “광주는 총기를 들고 일어난 하나의 폭동”이라고 발언해 공분을 샀다. 1995년 내란 혐의 재판과정에서는 “억울하다. 왜 나만 갖고 그래”라고 했다. 1997년 법원이 뇌물 수수 혐의를 유죄로 인정해 2205억원의 추징금 납부를 명령하자 “예금자산이 29만원 밖에 없다”며 버티기로 일관해 빈축을 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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