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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가에서는 일본 얘기의 진실 여부를 떠나 이런 환경을 만든 우리 정부의 외교정책이 안일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우리 정부가 시종일관 주장한 지소미아 종료 철회의 조건은 일본의 수출규제 조치 철회였다. 하지만 이번에 종료 유예 결정을 하면서 내민 조건은 수출규제 조치 관련 대화를 시작한다는 것이었다. 일본이 수출규제 조치를 철회하겠다는 아무런 확답없이 대화 시작만으로 종료 결정을 미룬 것이다. 당장 일본은 수출규제 조치에 대한 입장 변화가 없다는 식의 얘기도 흘리고 있다. 단순히 대화를 재개하는 것은 지소미아를 종료한 후에도 언제든 할 수 있는 일이다. 정부는 그동안 지소미아 종료 후에도 일본의 태도 변화만 있으면 언제든 지소미아를 복원할 수 있다고 공언해 왔다. 굳이 예상치 못한 종료 유예 결정으로 국민 자존심에 상처를 낼 필요가 없었다는 얘기다. 또 일본의 이중적 태도를 보며 우리 정부가 치열한 외교 현장에서 너무 순진한 판단을 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번 결정은 또한 문재인 정부의 핵심 지지층인 진보세력의 마음을 돌아서게 했다. 진보층은 지소미아 종료 결정에 대해 높은 지지를 보냈다. 정부의 발표 이후 온라인상에서는 문 정부에 대한 지지철회를 표명하는 의견이 다수 개진됐다. 실제 진보성향 600여개 단체로 구성된 ‘아베규탄 시민행동’은 지난 23일 청와대 앞에서 ‘지소미아 종료 번복 문재인 정권 규탄 회견’을 열었다.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과 참여연대 역시 비판 논평을 내놨다. 이같은 진보층의 움직임은 당장 내년 4월 총선을 치러야 하는 더불어민주당에게도 적잖은 부담이 되고 있다. 게다가 민주당은 이해찬 당대표까지 나서 지소미아 종료의 정당성을 설파해 온 터라 입장이 더 머쓱하게 됐다.
이제 우리 정부에겐 딱 한번의 기회가 남았다. 올해 안에 일본의 수출규제 조치 철회를 받아내거나 지소미아 종료 결정을 내리는 결단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시간끌기 전략을 펼칠 일본에게 질질 끌려가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지소미아는 문재인 정부 최악의 외교 실패 사례로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