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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검색결과 44건

정몽주의 선비정신 용인에서 살아나다 '제19회 포은문화제'
  • 정몽주의 선비정신 용인에서 살아나다 '제19회 포은문화제'
  • [용인=이데일리 황영민 기자]고려 말 충신 포은 정몽주 선생을 기리는 ‘제19회 포은문화제’가 7일 용인특례시 처인구 모현읍 포은 선생 묘역에서 막을 올렸다.포은문화제의 백미 전국 한시백일장.(사진=용인문화원)8일까지 진행되는 올해 포은문화제에서는 정몽주 선생을 주제로 한 공연과 어린이 포은스쿨, 포은학당 및 용인시 민속예술제, 전국 한시 백일장, 서예 퍼포먼스 등 각종 행사가 펼쳐진다. 이날 개막식에는 이상일 용인특례시장과 윤원균 용인특례시의회의장을 비롯해 전현직 용인문화원장과 문화제를 기획한 문화원 관계자들이 참석했다. 이상일 시장은 “우리가 이렇게 포은 선생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것은 포은 선생으로부터 교훈을 얻어 우리가 살고 있는 용인특례시와 대한민국을 더욱 발전시키기 위해서다”라며 “포은 선생은 나라와 백성을 위한 일이라면 목숨도 바칠 각오로 활동했고, 성리학뿐 아니라 외교와 군사 분야에서도 훌륭한 업적을 남긴 개혁가였다”고 강조했다. 이 시장은 “조선시대 퇴계 이황 선생과 정암 조광조 선생, 학포 양팽손 선생과 우암 송시열 선생 등이 흠모했던 포은 선생이 용인에 자리 잡게 된 이유, 포은 선생의 활동, 그분의 훌륭하고 서정적인 여러 시(詩)들이 시청에서 발간하는 ‘용인소식’ 10월호에 잘 실려 있으니 살펴보기 바란다“며 ”포은 문화제가 선생의 정신을 기릴 뿐 아니라 교훈의 실천을 통해 용인을 바꾸는 역할을 하면 좋겠다”고 말했다.7일 포은문화제 개막식에서 이상일 용인특례시장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사진=용인시)최영철 용인문화원장은 기념사를 통해 “19회를 맞이한 포은 문화제는 초창기 많은 어려움을 이겨내고 쌓인 연륜만큼이나 다양한 내용을 담아내 경기도를 대표하는 문화제로 발돋움했다”며 “많은 시민이 포은 정몽주 선생에게서 배우고 본받을 수 있는 더 좋은 프로그램을 개발하기 위해 앞으로도 노력하겠다”고 했다. 한편, 용인특례시는 포은 정몽주의 사상과 선비 정신을 상세하게 기록한 ‘용인소식’ 10월호를 행사장에 비치했고, 많은 시민들이 시민들이 이를 집어들고 내용을 살펴봤다. ‘용인소식’은 용인특례시의 다양한 시정(市政)과 사업, 각종 행사·뉴스·생활정보 등을 알리는 타블로이드판 월간지로 구독을 원하는 시민들이 매달 1000여명씩 늘어나고 있다. 구독을 희망하는 시민은 시청 공보관실로 전화하면 우편으로 받아 볼 수 있다.
2023.10.08 I 황영민 기자
역사를 바꾼 한 방울, 독약
  • 역사를 바꾼 한 방울, 독약 [물에 관한 알쓸신잡]
  • [최종수 토지주택연구원 연구위원] “죄인은 사약을 받으라.”죄인은 임금을 향해 큰절을 올리고 두 손으로 약사발을 들어 사약을 마십니다. 한 사발을 다 마시기도 전에 죄인은 피를 토하면서 쓰러집니다. 사극에서 빠지면 왠지 섭섭한 단골 장면입니다.(이미지=이미지투데이)죽음을 명한 약이기는 해도 임금이 내렸기 때문에 아무나 사약을 받을 수는 없었습니다. 어느 정도의 사회적 지위가 있어야만 가능했지요.사약은 사람을 죽게 하는 약이니 사약의 ‘사’는 당연히 ‘죽을 사(死)’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틀렸습니다. 임금이 하사하는 약이라는 의미로 ‘줄 사(賜)’를 씁니다.기억해 보면 사약을 받는 죄인은 대부분 명망 있는 선비거나 궁궐 내 왕의 친인척으로 대부분 지체 높은 분들이었습니다. 사약은 고위 관료나 왕실 친인척이 큰 죄를 지었을 때 임금이 내리는 특혜성 처형이라 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사약을 받은 사람은 왕의 처소를 향해 네 번 큰절을 올리고서 마시는 게 관행이었습니다.사약은 대체 무엇으로 만들었기에 한 사발도 마시기 전에 피를 토하면서 죽는 걸까요? 사약은 임금이 내리고 사람을 죽이는 약이었기 때문에 아무나 조제할 수 없었습니다. 궁중의 의약을 만드는 내의원에서 철저한 보안 속에서 제조하고 관리했기 때문에 아쉽게도 사약에 대한 ‘레시피’는 남아 있지 않습니다.관련 기록이나 문헌이 남아 있지 않아 사약 성분을 정확하게 알 수는 없고 다만 추정만 할 뿐이지요. 당시 독이 강한 것으로 알려진 비상, 부자, 천남성과 같은 재료를 섞어서 제조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사약은 임금이 죄인을 죽이는 약이지만 정치적 반대 세력의 손에 들어가면 임금 목숨이 위태로워질 수 있었기 때문에 사약 조제법을 극비에 부치는 것은 당연했을지도 모릅니다.(이미지=이미지투데이)조선시대 독살설이 떠도는 임금과 세자는 우리에게 익숙한 문종, 단종, 연산군 등을 비롯해 10명이 훌쩍 넘습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임금을 비롯한 왕족은 늘 독살을 두려워했고 음식에 독이 들어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수라상 음식을 사전에 맛보는 기미상궁을 뒀습니다.정확한 ‘레시피’도 없고 의학 지식도 변변하지 않다 보니 약발이 좋은 ‘죽여주는’ 사약을 늘 만들 수는 없었나 봅니다. 더군다나 사약을 받을 죄인이 먼 귀양지에 있는 경우 여러 날을 운반해 가는 동안 사약이 상해 약효가 떨어지는 경우도 비일비재했을 겁니다.상황이 이렇다 보니 약발이 좋지 않아 죄인이 사약을 마시고도 죽지 않는 웃지 못할 해프닝도 있었습니다. 사약을 조제한 내의원에서도 이런 경우에 대비해 사약을 만들어 보낼 때는 추가로 ‘리필’이 가능하도록 여유 있게 챙겨 보냈습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송시열, 조광조가 받은 사약도 약발이 시원찮은 사약이었는지 여러 사발을 마시고 나서야 숨을 거뒀다고 합니다.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사약을 받은 임형수라는 사람은 무려 16잔의 사약을 마시고도 죽지 않아 결국 목을 매어 죽었다고 전해집니다. 조선왕조실록에 실린 그의 기록을 보면 사약을 마시는 도중 사약을 전하러 온 의금부 서리를 보고 ‘그대도 한 잔 마시겠는가?’라는 말을 건네는 여유까지 부리며 사약을 마셨다고 합니다. 사극에서 단골처럼 등장하는 사약 사발을 마시다 말고 피를 토하며 쓰러지는 것은 모두 극적 효과를 위한 설정이라고 할 수 있지요.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독을 이용해 사람을 죽이는 독살은 공공연한 비밀이었습니다. 독살이 인기가 높았던 이유는 다른 방법에 비해 은밀하게 죽일 수 있었고, 법의학이 발달하지 않았던 과거에는 사망 원인을 명확하게 밝혀낼 수 없었기 때문이지요. 타살이 의심되어도 독을 검출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명확한 증거를 가지고 밝혀내기는 쉽지 않았을 겁니다. 대부분의 독살이 아무도 모르게 은밀하게 이뤄졌던 것에 비해 조선시대 사약은 중앙정부에 의해 공공연하게 이뤄졌다는 점은 다른 나라에서는 유례를 찾기 어려운 독특한 사례입니다.죄인을 사형에 처하는 방법은 목을 베는 참수형이나 목을 매다는 교수형이 간단했을 텐데 왜 약발도 변변치 않은 약을 만들어서 보내는 번거로운 방법을 택했을까요? 이유는 조선시대 통치이념의 근간이었던 유교사상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이미지=이미지투데이)당시 중죄를 지은 죄인에게 극형의 처벌법은 교수형이나 참수형이 일반적이었는데 이 처벌법은 신체를 온전히 보존할 수 없었습니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몸은 머리카락도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는 인식이 강했던 당시에 신체를 훼손한다는 것은 사람답게 죽지 못한 것이나 다름없었지요.이에 비해 사약은 신체를 훼손하지 않고 깨끗하게 죽을 수 있는 방법이었던 셈입니다. 뿐만 아니라 당시 교수형과 참수형은 공개된 장소에서 이뤄졌기 때문에 본인과 가문에는 씻을 수 없는 치욕을 남기게 됩니다. 이에 비해 사약에 의한 사형은 사약을 들고 온 몇 사람만 보기 때문에 공개적인 불명예는 피할 수 있었지요. 명예와 명분을 목숨보다 더 귀하게 여겼던 당시 선비들은 세상을 떠나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치욕을 남기고 싶지는 않았을 겁니다. 당시 사회적 배경을 고려하면 임금이 사약을 내리는 것은 임금이 할 수 있는 일종의 배려이지 특권층만 누릴 수 있는 특혜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많은 사람들이 때로는 응당한 처분으로 때로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사약과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죄인에게 사약을 내려라”하던 공공연한 사약(賜藥)은 사라졌지만 미움이나 돈 때문에 누군가를 독살하려는 사약(死藥)은 여전히 우리 곁에 남아 있습니다.■최종수 연구위원(박사·기술사)은△토지주택연구원 연구위원 △University of Utah Visiting Professor △국회물포럼 물순환위원회 위원 △환경부 자문위원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청 자문위원 △대전광역시 물순환위원회 위원 △한국물환경학회 이사 △한국방재학회 이사
2022.06.25 I 이명철 기자
역사에 대한 밝은 안목과 바른 실천
  • [김병일의 선비이야기]역사에 대한 밝은 안목과 바른 실천
  • [김병일 도산서원 원장·전 기획예산처 장관]대선 정국에서 국가 리더십에 관심이 높아지자 역사적 인물을 재조명하는 일이 잦다. 한 TV채널에서 태종 이방원을 소환하고 있는 것이 좋은 예다. 어떤 역사학자는 사석에서 드라마를 보고 역사 공부를 한다고 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현실에서 드라마 작가나 식자층, 지도층의 역사 인식은 일반인에게 큰 영향을 미친다. 그렇기에 전달하는 사람이나 전달받는 사람 모두 역사와 인물에 대해 평소 밝은 안목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먼저, 전체를 보고 판단해야지 부분만 보아서는 안 된다. 역사는 시간이라는 무대 위에서 여러 요소들이 관계를 맺으며 전개되는 과정이다. 이것을 무시하고 자기에게 필요한 부분만 인용하면 역사 오용이다. 다음으로, 역사에서 장점을 찾아 배워야지 작은 단점만 찾아 비판하는 것도 금물이다. 특히 오래 검증된 역사적 위인은 더욱 신중해야 한다. 드라마 태종 이방원에도 등장한 포은 정몽주 선생(1337~1392)에 대한 평가가 대표적이다.포은은 고려에는 충신이나 조선 건국에는 걸림돌이 되어 이방원이 보낸 자객에 의해 암살되고 3개월 뒤 조선은 건국된다. 그러나 불과 10년 후 태종은 그를 만고의 충신으로 높이며, 명예와 관작을 회복시키고 자손도 등용하였다. 또 100여년이 지난 중종 때에는 우리나라에 성리학을 뿌리내린 분으로 떠받들어지며, 공자가 모셔진 문묘에 조선 최초로 모셔진다. 고려의 충신인 포은이 조선에서 최고의 학자이자 충절의 롤모델로 우뚝 서게 된 것이다. 1517년, 퇴계 선생(1501~1570) 17세 때다.50년 세월이 흘러 만년의 퇴계에게 한 제자가 “앞 왕조(고려)에서 왕씨의 후계를 세운 사람이 신씨(우왕과 창왕)였는데, 포은 선생은 그대로 받들면서 물러나지 않았으니 뒤에 공이 있었다 할지라도 어찌 속죄 받을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그러자 퇴계는 “그렇지 않네, 이어지게 한 사람은 신씨이지만 왕씨의 종사가 아직 망하지 않았으므로 포은께서 섬긴 것이네.”라고 답하였다. 포은이 나라를 위한 충성심과 성리학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높이고 배워야지 고려 말 우왕과 창왕을 섬긴 그의 처신을 문제 삼아서는 안 된다고 판단한 것이다. 퇴계의 이런 생각은 다시 100여년 지나 우암 송시열 선생(1607~1689)에게 계승된다. 우암은 포은 묘소 앞 신도비문에 “퇴계 선생의 말씀은 참으로 옳다.”고 남겼다. 퇴계와 우암으로부터 역사를 보는 안목과 위인의 장점을 배우려는 지혜를 볼 수 있다.역사적 안목은 사명감과 실천력과 직결된다. 당시 조선 통치이념은 인간의 착한 본성과 올바른 이치를 지향하는 성리학이었지만, 현실에서는 골육상쟁의 왕위 쟁탈과 선비들이 죽거나 ㅤ쫓겨나는 사화가 이어졌다. 어찌해야 좋단 말인가? 퇴계는 이에 대해 ‘임금 한사람만 성군이 되도록 하기보다 근본적으로 백성이 깨어나야 한다. 그러려면 솔선수범하며 이끌어갈 엘리트 선비가 육성되어야 한다. 이런 선비를 길러내려면 민간이 훌륭한 선현을 모시고 공부하는 서원을 설립하는 것이라’ 고 확신하였다. 그래서 성리학을 도입한 안향 선생을 모신 백운동서원을 1550년 최초의 사액서원으로 격상시키는 일에 앞장섰다. 오늘날의 소수서원이다.이어서 퇴계는 포은을 모시는 서원을 세워야 한다고 판단하고 선생이 자란 외가가 있는 영천의 제자들에게 권하였다. 이에 김응생, 노수, 정윤량 등 제자들은 1553년 서원을 창설하고 이듬해 두 번째로 사액을 받았다. 바로 임고서원이다. 서원에서 긴요한 책을 구하러 온 제자에게 임금이 하사한 책 《내사성리군서內賜性理群書》를 건넸다. “아니 임금이 내려준 책을 남에 주다니”라는 사람에게 퇴계는 “서원에 보내면 성현과 후학을 위하는 것인데 어찌 남이라 할 수 있는가”라며 관철했다. 책은 혼자 읽는 것보다 많은 학자들이 읽고 실천하면 더 이롭다고 여겼기 때문이다.역사와 위대한 인물을 공부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의 진지한 사유와 치열한 행동을 통해 과거에서 교훈을 얻고 미래를 현명하게 설계하는 안목을 키우고 실천하는 것이다. 역사인물에 대한 호출이 잦아진 현실에서 모두 잊지 말아야 할 점이다.
2022.01.07 I 송길호 기자
 ‘왕의 숲길’ 걸으며 세종의 애민을 엿보다
  • [여행] ‘왕의 숲길’ 걸으며 세종의 애민을 엿보다
  • 세종대왕릉인 ‘영릉’의 홍살문과 정자각까지 이어진 향로와 어로[이데일리 강경록 기자]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 ‘훈민정음’(訓民正音). 한글이 창제됐을 당시의 공식 명칭이다. 이름에서조차 구구절절 백성의 고초를 살피는 세종의 따뜻한 마음씨가 묻어난다. 날마다 듣고 쓰는 우리말과 글이지만, 정작 우리는 한글과 세종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세계에서 유일하게 만든 사람과 반포일, 창제원리가 알려진 뛰어난 문자다. 다가오는 한글날(10월 9일). 세종이 잠들어 있는 경기도 여주에서 한글을 만든 세종의 고마움을 생각하고, 우리말과 글을 소중히 여기며 제대로 쓰고 있는지 되돌아보는 것은 어떨까?◇영릉(英陵)과 영릉(寧陵)을 잇는 ‘왕의 숲길’을 걷다여주는 세종과 인연이 깊은 고장이다. 능서면에는 세종이 550여년 동안 잠들어 있는 영릉(英陵)이 있다. 남한강에 자리한 천년고찰 신륵사는 세종의 원찰이 되면서 세간에 더욱 알려졌다. 점동면 덕평리에 있는 제간공 권규의 묘역 역시 빠트릴 수 없다. 태종의 셋째 딸이자, 세종의 누이인 경안공주가 잠들어 있다. 세종실록에 따르면, 세종과 경안공주는 우애가 남달랐다. 천성과 기품이 서로 닮아서 궁에서 그 현명함이 함께 일컬어졌다고 한다.세종의 흔적이 곳곳에 남은 여주에서 처음으로 찾아간 곳은 영릉이다. 영릉은 조선 4대 임금인 세종과 그의 비인 소헌왕후가 함께 묻힌 조선 최초의 합장묘다. 하지만 처음부터 이 자리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원래는 지금의 서울 서초구 내곡동 헌릉 자리에 있었다. 세종의 비인 소헌왕후가 승하(세종 28년)하자 당시 헌릉 서쪽에 쌍실의 능을 만들고 오른쪽 석실은 세종을 위해 만들어 놓았다가 세종 승하 후 합장했다. 하지만 이후 영릉 자리가 불길하다는 이유로 ‘능을 옮기자’는 주장이 이어지자 1469년(예종 1년)에 지금의 자리로 이장했다.세종대왕릉인 ‘영릉’(英陵)과 효종대왕릉인 ‘영릉’(寧陵)을 잇고 있는 ‘왕의 숲길’영릉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는 효종이 잠들어 있는 영릉(寧陵)이 있어 함께 둘러보기 좋다. 영릉(寧陵)은 효종과 그의 비 인선왕후의 능이다. 이 두 영릉을 영녕릉(英寧陵)이라 부른다. 영릉에서 영릉(寧陵)까지는 ‘왕의 숲길’이라는 약 700m의 산길을 걸어야 한다. 훗날 정조가 이곳에 와서 효종의 영릉을 참배한 후 이어서 세종의 영릉을 참배했는데, 그때 걸었던 길이었다는 기록에서 왕의 숲길이라고 이름 붙었다.날씨가 좋다면 여강길의 6코스와 4코스를 걸어보는 것도 좋다. 여강길 6코스인 ‘왕터쌀길’(10.2km)은 남한강(여강)을 곁에 두고 걸을 수 있고, 4코스인 ‘5일장터길’(13km)은 신륵사에서 출발해 세종대왕릉까지 이어지는 길이다.여주한글시장 상가에 설치된 세종대왕 조형물◇500년 역사의 여주장 잇는 ‘한글시장’여주 시내에는 한글을 주제로 한 ‘한글시장’이 있다. 한글시장은 5개 구역으로 나뉜다. 1구역은 여주시청 입구에서 시작하고, 4구역까지 차례로 이어진다. 중앙로를 중심으로 양옆에 골목이 연결되는데, 벽화를 보려면 2구역과 3구역 사이를 찾는다. 이곳에 세종대왕의 업적을 표현한 벽화가 있다. 탄생부터 즉위, 측우기 제작, 훈민정음 창제까지 세종대왕의 일대기를 재미있게 묘사했다. 벽화가 있는 낮은 담이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고, 그림의 선명한 색이 골목을 환하게 만든다.벽화를 좀 더 보고 싶다면 4구역 벽화골목으로 가자. 열심히 사군자를 그리는 세종대왕 모습이 제법 진지하다. 좁은 길을 따라 안으로 들어갈수록 추억에 빠져든다. 말뚝박기에 푹 빠진 장난꾸러기들의 익살스러운 모습에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진다. 길지 않은 골목에서 문득문득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여주한글시장 전경여주 14개 마을 주민에게 들은 이야기와 채집한 물건을 전시하고 있는 ‘여주두지’도 근처다. 두지는 쌀을 보관하는 ‘뒤주’를 한자로 표기한 말. 새색시가 타던 가마와 우편배달부의 신발, 이발소 가위 등 소소한 물건이 가지런히 놓였다. 여주 사람들의 일상적인 생활과 밀접한 이야기와 물건이라 더 마음이 간다.여주두지를 돌아본 뒤에는 소년 세종 포토존으로 향한다. 영특해 보이는 소년 세종 동상이 인자한 표정으로 책을 들고 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발걸음을 멈추고 이곳에서 기념사진을 남긴다. 포토존 옆에 마련된 의자는 자음을 형상화해 눈길을 끈다.한글시장에는 다양한 한글도 만날 수 있다. 시장 간판 대부분은 한글이다. 시장 입구 바닥에는 훈민정음이 새겨졌고, 하늘에 알록달록한 한글 작품이 걸렸다. 글자로 사용하던 한글이 미술 작품으로 다가오는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다.우암 송시열 선생의 영정을 모신 대로사◇영릉(寧陵) 보며 비통해한 ‘대로’ 송시열을 기리다한글시장에서 남한강 쪽으로 도로 건너편에 ‘대로사’(강한사)가 있다. 대로사는 송시열을 기리기 위한 사당이다. 송시열은 살아생전 여주에 머물 때마다 이 자리에서 효종의 능인 영릉(寧陵)을 바라보고 비통해했고, 후진에게는 북벌의 대의를 주장했다고 한다. 이에 정조는 유생들의 요청에 송시열을 기리는 영당(影堂)인 대로사(大老祠)를 짓도록 허락했다.홍살문을 지나자 대로사비각, 중문을 지나면 대로서원 강당, 삼문을 지나면 우암의 영정을 모신 대로사 본채가 나온다. 대로사비각(경기도 유형문화제 제84호)은 정조가 친히 비문을 짓고 전서로 글씨를 쓴 비석이다. 장대한 비석 우측 상단에 ‘어필’이라는 글씨가 있다.대로서원 강당중문을 지나면 대로서원이다. 팔각지붕에 정면 6칸 측면 4칸의 품위 있는 건물이다. 강당에 올라서니 여강에서 불어오는 강바람이 시원하다. 강당 처마 밑에는 ‘대로서원’ 현판이 걸려있다. 또 안에는 전서의 대가인 이한진의 전서로 된 ‘첨백당’과 황운조가 행서로 쓴 ‘강한루’ 편액, 이기진이 지은 ‘강당상량문’과 1785년에 이조판서 서유린이 짓고 쓴 ‘대로사상량문’도 걸려 있다. 강당 우측의 장린문 너머는 대로사 본채다. 영릉이 위치한 서쪽을 바라보게 세워졌다. 아쉽게도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지금은 문을 닫아둔 상태. 사당에는 송시열의 복제본 초상화가 걸려 있다.대로사의 또 다른 이름은 강한사다. 1871년(고종8년) 흥선대원군은 전국의 서원과 사우를 47개만 남기고 대부분 철폐했는데, 대로사는 다행스럽게도 살아남았다. 이때 명칭을 강한사로 개칭했는데, 이유가 조금 재미있다. 흥선대원군이 스스로를 ‘대로’(大老)라 했기 때문이다. 연암 박지원의 손자이자 실학자인 대제학 박규수가 왕명을 받아 쓴 ‘강한사’라는 현판이 남아있다. ‘강한’은 여주의 풍광이 아름답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대로사비
2021.10.08 I 강경록 기자
정약용·김정희 등 선조들 삶 담긴 '옛길' 6개소 명승된다
  • 정약용·김정희 등 선조들 삶 담긴 '옛길' 6개소 명승된다
  • [이데일리 김은비 기자] 문화재청은 ‘삼남대로 갈재’, ‘삼남대로 누릿재’, ‘관동대로 구질현’, ‘창녕 남지 개비리’, ‘백운산 칠족령’, ‘울진 십이령’ 총 6개소의 옛길을 국가지정문화재 명승으로 16일 지정 예고했다. 과거 옛길은 고려 시대 통치의 목적으로 건설된 역로로 조선 시대로 이어지면서 국가의 중요한 시설로 여겨졌다. 조선 후기에는 상업이 발달하면서 물자의 교류가 활발해졌고, 이용이 빈번한 도로가 대로로 승격되며 9개 대로 체계가 완성됐다. 삼남대로, 관동대로, 영남대로, 의주대로 등의 간선도로는 한양을 중심으로 전국을 연결했으며, 점차 민간교역로의 기능을 맡게 됐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당시 대부분의 옛길이 신작로로 바뀌는 과정에서 길이 확장되고 가로수가 세워지면서 본래 모습을 잃게 됐다. 남은 옛길마저 후대에 임도로 사용되면서 훼손된 경우가 많아 오늘날 남아있는 옛길이 더 이상 훼손되지 않도록 보존할 필요가 있었다.이번 ‘삼남대로 갈재’ 등 6개소의 옛길은 문화재청의 ‘옛길 명승자원조사’ 결과와 관계전문가, 지방자치단체의 추천을 받아 발굴한 옛길 잠재자원 21개소 중 현지조사, 문화재위원회 검토 등을 거쳐 역사문화적 가치, 경관적 가치, 생태적 가치, 활용 가치 등을 고려하여 명승으로 지정 추진됐다.삼남대로 갈재 정상(사진=문화재청)‘삼남대로’는 한양에서 삼남지방(충청·전라·경상)으로 가는 길로, 삼례, 전주, 태인, 정읍, 나주, 강진을 거쳐 해남의 이진항에서 제주에 이르는 약 970리 길을 말한다.이곳은 전라북도와 전라남도를 구분하는 상징적인 장소로 조선 시대 많은 문인들이 이곳을 지났다는 기록을 통해 이곳의 역사적 가치와 중요성을 알 수 있다. 또 송시열이 기사환국으로 사사되기 전 마지막 여정이 갈재였으며, 동학농민군이 장성에서 대승을 거두고 곧바로 정읍으로 향하기 위해 갈재를 넘었다고 한다. ‘삼남대로 누릿재’ 역시 조선 시대 강진과 영암을 잇는 삼남대로의 중요한 고갯길이다. 정약용, 최익현, 송시열, 김정희 등 많은 문사들의 방문기록이 내려오는 등 역사적 가치가 큰 옛길이다. 특히, 정약용은 강진에서 유배를 지내며 월출산과 누릿재를 여러 시와 글로 남기기도 했다. 조선 시대 강진, 해남, 제주 등지로 유배를 떠나는 경로였으며, 반대로 강진, 해남 일대의 선비들이 과거를 치르러 가는 길이기도 했다. 월출산을 넘어 강진으로 가는 길은, 험하지만 거리가 짧은 누릿재와 상대적으로 낮은 고개를 넘어가는 불티재가 있었으나,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누릿재를 주로 이용했다고 한다.관동대로 구질현의 V자형 지형(사진=문화재청)‘관동대로 구질현’은 강원도에서 한양, 수도권으로 향하는 관동대로의 일부다. 길 주변에는 계단식 지형이나 습지가 형성된 것으로 보아 농사를 지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1940년대 중앙선 철로가 개통된 이후에도 주민들은 양동면 시장이나 지평시내를 갈 때에 기찻삯을 아끼기 위해, 또는 소나 말 등을 기차에 싣고 갈 수 없어 옛길을 이용했다고 한다. 이곳은 남한강 수운을 이용하기 위해 거쳐야 하는 길목으로 오랜 시간 많은 사람들이 다니면서 V(브이)자형의 독특한 지형이 형성되어 있고, 옛길을 따라 울창한 수림이 우거져 있어 경관이 빼어나다.창녕 남지 개비리와 낙동강(사진=문화재청)‘창녕 남지 개비리’는 박진 기강이 만나는 곳에 위치한 옛길로 소금과 젓갈을 등에 진 등짐장수와 인근 지역민들의 생활길로 애용됐다. 일제강점기 지형도에도 옛길의 경로가 기록되어 있는 유서 깊은 곳이다. 개비리는 ‘개가 다닌 절벽(비리)’ 또는 ‘강가(개) 절벽(비리)에 난 길’이라는 뜻으로, 선조들은 과거 낙동강의 수위가 지금보다 높아 발아래에는 강물이 차오르고, 아슬아슬한 벼랑길임에도 생계를 이어나가기 위해 옛길에 올랐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신작로를 만들 때 자동차가 통행할 수 있는 최소한의 경사와 너비를 확보하기 어려웠던 덕에 옛길의 모습이 비교적 잘 남아 있다. 벼랑길에서 조망되는 낙동강의 모습과 소나무, 상수리나무 등으로 이루어진 식생이 옛길과 어우러져 자연경관이 아름다운 명승지이다.백운산 칠족령 전망대에서 바라본 동강(사진=문화재청)‘백운산 칠족령’은 평창과 정선을 연결하는 대표적 고갯길이다. 이곳은 동강(남한강 상류)에 이르는 최단 경로로서 1960년대까지만 해도 동강을 통해 소백산 일대 금강송을 서울로 운송하던 떼꾼들이 애용했다고 전해진다. 길을 따라 감입곡류를 이루는 동강의 빼어난 경관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울진 십이령 입구(내성행상 불망비)(사진=문화재청)‘울진 십이령’은 두천원을 기점으로 봉화 인근 내륙의 생산품과 울진 인근의 해산물을 교역하던 십이령의 일부로, 샛재·바릿재 등 옛 십이령의 주요지점이 잘 남아있다. 십이령은 울진과 봉화에 걸쳐 위치한 12개의 큰 고개를 말하며, 영남지방을 대표하는 험준한 길로 사대부보다는 주로 상인들이 오가던 길이었다. 조선 후기 문신 이인행(1758~1833)은 ‘신야집’에 유배지까지의 여정 중 겪었던 험한 길 중 십이령을 첫 번째로 꼽았다. 이곳에서 어염(魚鹽)을 파는 상인들이 끊임없이 왕래하던 모습을 남겼다. 실제 울진 십이령은 울진 내성행상 불망비, 성황당과 주막 터, 현령 이광전 영세불망비 등 보부상과 관련된 역사문화적 요소가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특히, 샛재에 위치한 ‘조령 성황사’는 옛 보부상들이 성공적인 행상을 기원하며 제사를 지내던 곳으로, 오가는 길손들뿐만 아니라 주민들이 정기적인 배향을 하는 유서 깊은 곳이다. 문화재청은 옛길 6개소에 대해 30일간의 예고 기간 동안 각계의 의견을 수렴한 후,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국가지정문화재 명승으로 최종 지정할 계획이다.
2021.09.16 I 김은비 기자
100m 병풍 펼친듯..한폭의 동양화 따로 없네
  • [인싸핫플]100m 병풍 펼친듯..한폭의 동양화 따로 없네
  • 금강 건너편 카페에서 바라본 부소담악[이데일리 강경록 기자] 우리 조상들은 그림처럼 아름다운 풍경을 흔히 금강산에 비유했다. 충북 옥천의 부소담악(赴召潭岳)도 그중 하나다. 병풍을 펼쳐 놓은 듯 이어지는 바위절벽과 호수의 모습이 마치 한 폭의 동양화를 연상케 한다. 이 모습에 반한 우암 송시열은 ‘작은 금강’이라고 예찬했을 정도다.부소담악으로 가는 길. 옥천읍에서 4번 국도에 올라 대전 방면으로 향하다 환경사업소에서 우회전해 이지당을 거쳐 15번 군도를 따라가면 부소담악에 닿는다. 고리산(환산·581m) 둘레를 도는 이 길은 대청호 상류의 물길을 바라보며 달리는 멋진 드라이브 코스. 부소담악은 대청호 상류 쪽 추소리 부소무니 마을 앞에 자리하고 있다. 부소무니는 고리산 자락 아래 물에 뜬 연꽃(연화부수·蓮花浮水)의 명당이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부소담악은 부소무니 마을 앞 물가에 떠 있는 산이라 해서 부르는 이름이다.부소담악의 지금의 모습은 대청댐 준공으로 물에 잠기면서다. 이후 칼날 같은 능선만 수면 위에 길게 드러났다. 물에 잠긴 부분의 흙은 씻겨나갔고, 물가에 비친 절벽은 정교한 아름다움을 빚어냈다. 700m에 이르는 이 절벽의 이름은 병풍바위. 봄이면 연둣빛 신록으로, 가을에는 붉은 단풍으로 계절마다 옷을 갈아입으며 옥천 최고의 비경으로 사랑받았다.금강 건너편 카페에서 바라본 부소담악 병풍바위고요한 물길을 따라 잘 다듬어진 덱길을 10여 분 따라 걷다보면 장승공원이다. 이곳을 지나 언덕 위로 올라가면 조그만 정자 ‘추소정’이 나타난다. 추소리 마을 이름을 딴 정자다. 대청댐으로 수몰되기 전 이곳에는 추동마을·부소마을·절골 등 세 마을이 있었다. 이후 절골을 제외한 두개 마을 터가 물속에 잠겼다. 추소리는 추동마을의 ‘추’와 ‘부소마을의 ’소‘자를 가져와 붙인 이름이다. 수몰로 인해 마을주민들은 생활 터전과 비옥한 농토를 잃었지만, 역설적이게도 아름다운 기암괴석을 얻은 셈이다.추소정에 오르면, 나뭇가지 사이로 부소담악이 모습을 드러낸다. 앞쪽으로 야트막한 능선이 악어처럼 웅크린 모습이다. 능선이 강물과 만나는 절벽이 부소담악. 물이 차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오히려 강물과 능선이 어우러진 모습이 장관이다. 날카롭게 솟은 칼바위와 그 사이를 뚫고 나온 할배소나무 등 수천년의 세월의 버텨온 자연의 신비로움 앞에 숙연해진다. 사실 이 모습 제대로 보려면 배를 타고 강 위에서 바라보는 것이 좋다. 추소정 건너편 호숫가에 있는 미르정원에서는 입장객들을 배에 태워 부소담악 일대를 둘러보게 하는 서비스를 제공한다. 부소담악 건너편에 자리한 카페에서도 부소담악을 조망할 수 있다. 충북 옥천 부소담악 산책길
2021.06.04 I 강경록 기자
높이 3m 구례 화엄사 '목조비로자나삼신불좌상' 국보 된다
  • 높이 3m 구례 화엄사 '목조비로자나삼신불좌상' 국보 된다
  • [이데일리 김은비 기자] 현존하는 우리나라 불교조각 중 삼신불로 구성된 유일한 작품인 구례 화엄사 목조비로자나삼신불좌상이 국보가 된다.문화재청은 보물 ‘구례 화엄사 목조비로자나불삼신불좌상’을 국보로, ‘울진 불영사 불연’을 비롯해 ‘완주 송광사 목조석가여래좌상 및 소조십육나한상 일괄, ’송시열 초상‘ 등 3건을 보물로 각각 지정 예고했다고 28일 밝혔다.구례 화엄사 목조비로자나삼신불좌상(사진=문화재청)화엄사 목조비로자나삼신불좌상은 2008년 보물로 지정돼 조선 시대 17세기 불교사상과 미술사 연구의 중요한 사례로 평가받아 왔다. 삼신불은 화엄사상에 기반한 도상으로는 종종 보이지만, 조각품으로는 화엄사 사례가 유일하다.화엄사 대웅전에 봉안된 이들 좌상은 모두 3m가 넘는 초대형 불상이다. 1635년(인조 13년) 당시 유명한 조각승인 청헌과 응원, 인균과 이들의 제자들이 제작했다.최근 발견된 삼신불의 복장유물 등 관련 기록에 따르면 임진왜란 때 소실된 화엄사를 재건(1630∼1636)하면서 대웅전에 봉안하기 위해 삼신불을 제작한 시기(1634∼1635년)와 과정, 후원자, 참여자들의 실체가 확인됐다.발원문에 의하면 전국 승려집단의 대표라 할 수 있는 팔도도총섭을 역임한 벽암 각성(1575∼1660)의 주관으로 선조(재위 1567∼1608)의 여덟 번째 아들 의창군 이광(1589∼1645) 부부와 선조의 사위 동양위 신익성(1588∼1644) 부부 등 다수의 왕실 인물과 승려 580여명을 포함한 총 1320명이 시주자로 참여했다.이 삼신불좌상은 화려한 연꽃 대좌(부처가 앉는 자리)와 팔각형 목조대좌에서 결가부좌하고 있다. 거대한 규모와 더불어 단순하면서도 선이 굵게 처리된 조각솜씨로 인해 중후한 느낌을 준다.문화재청은 “당시 가장 유명했던 조각승 집단인 청헌파와 응원·인균파가 참여한 만큼 표현에서도 각 유파의 조각 특징을 잘 보여준다”며 “근엄한 표정의 비로자나불과 석가모니상은 청헌파가 제작한 것으로 판단되며, 부드러운 얼굴에 작은 눈과 두툼한 눈두덩이가 표현된 노사나불상은 응원과 인균의 작품으로 추정된다”고 설명했다.이어 “17세기에 제작된 목조불상 중 가장 크고, 조각으로 삼신불을 표현했다는 점에서 불교조각사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크고 중요하며, 예술·조형적 수준도 조선 후기 불상 중 단연 돋보이므로 국보로 지정해도 손색이 없다”고 평가했다.울진 불영사 불연(사진=문화재청)보물로 지정 예고된 울진 불영사 불연(가마)은 1670년(현종 11년) 화원으로 추정되는 광현, 성열, 덕진 등이 참여해 조성한 2기의 불교의례용 가마로, 지금까지 알려진 약 20기의 조선 후기 가마 중 형태가 가장 온전하다. 불교목공예의 일종인 불연이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가치를 인정받게 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울진 불영사 불연은 2기 모두 1670년이란 제작 시기와 승려 학종이 좋은 장인을 만나 불연을 제작한 동기와 배경, 제작에 동참한 시주자, 불연 제작자로 추정되는 스님 등이 기록돼 있어 조선 후기 불교목공예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라고 문화재청 측은 평가했다.완주 송광사 목조석가여래삼존좌상 및 소조십육나한상 일괄은 1656년(효종 7년) 만든 불상으로, 당시 제작된 나한상 중 수량과 규모 면에서 최대다. 역량이 뛰어났던 17세기 조각장들을 계승한 조각승들이 승려 벽암 각성의 요청을 받아 제작했다.송시열 초상은 조선 중기 정치와 학문에서 뚜렷한 자취를 남긴 성리학의 대가 송시열(1607∼1689)을 그린 18세기 초상화다. 충북 제천 황강영당에 300년 넘게 봉안돼와 그간의 내력이 분명하다. 문화재청은 예고 기간 30일 동안 각계 의견을 수렴·검토하고 문화재위원회 심의를 거쳐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할 예정이다.
2021.04.28 I 김은비 기자
 만추, 마지막 가을을 ‘완주’하다
  • [여행] 만추, 마지막 가을을 ‘완주’하다
  • 전북 완주와 충남 논산, 금산이 경계를 이루는 곳에 우뚝 솟은 대둔의 명물 금강구름다리. 지상으로부터 80m 정도 높이에 있는 구름다리는 중앙으로 갈수록 흔들림이 더 많아지고 고도감도 절정에 이른다.[완주(전북)=글·사진 이데일리 강경록 기자] 가을이 떠나갈 채비를 한다. 정 없이 떠나는 가을의 멱살이라도 잡아 세우고 싶은 마음에 마지막 늦가을 여행에 나선다. 목적지는 단풍이 남도 땅으로 내려가는 길목인 전북 완주의 대둔산. 노령산맥에 솟아 있는 대둔산은 주위에 오대산, 천등산 등과 한맥을 이루고 있다. 봄의 운해, 여름의 신록, 가을의 단풍, 그리고 한겨울의 설경 등 계절마다 한 폭의 동양화를 그려내는 ‘호남의 소금강’이라 불리는 산이다. 가을보다 겨울이 더 가까운 이 시기, 이번 주말 시간을 내어 대둔산에 올라보는 건 어떨까. 어물어물 하다간 올가을 마지막 단풍도 놓칠 수 있다.바라만 봐도 오금이 저리는 대둔산 명물 ‘삼선줄계단’◇늦가을이 가장 빛나는 ‘호남의 금강산’충남 논산과 금산, 그리고 전북 완주가 경계를 이루는 곳에 우뚝 솟은 산이 대둔산이다. 대둔산은 한듬산을 한자로 만든 이름. ‘한’은 크다, ‘듬’은 두메나 더미, 덩이라는 의미다. 우리말로 풀이하면 ‘큰두메 산’이나 ‘큰덩이 산’ 쯤 되겠다. 낙조대, 태고사, 금강폭포, 동심바위, 금강바위, 삼선약수터, 옥계동 계곡 등등. 마치 신이 빚은 듯한 비경이 곳곳에 숨어 있어 사계절 내내 등산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대둔산이 가장 빛나는 시기는 단연 늦가을. 형형색색 옷을 입은 병풍 같은 암봉들은 ‘작은 설악산’ 또는 ‘호남의 금강산’이라는 별명이 결코 과언이 아님을 보여준다. 이처럼 넋을 빼앗는 절경에 반해 신라시대 원효대사는 사흘 동안 대둔산에 머물렀다 하고, 만해 한용운과 우암 송시열도 대둔산의 아름다움을 칭송하는 글귀를 남겼다.등산로도 다양하다. 1코스는 대둔산도립공원 매표소~동심바위~구름다리~마천대~칠성봉~강군봉 갈림길~용문골 매표소로 이어지는 5.2㎞ 구간으로 3시간 30분이 걸린다. 2코스는 용문골매표소∼장군봉갈림길∼칠성봉∼마천대 구간 2.2㎞로 1시간 50분이 소요된다. 3코스는 운주면 완창리 안심사에서 출발해 서각봉∼마천대∼동심바위∼대둔산 주차장으로 이어지는 5.3㎞ 구간으로 3시간 50분 정도 잡아야 한다.사실 어느 쪽에서 오르든 상관없다. 아무리 긴 코스를 잡아봐야 3시간 30분 남짓이면 정상인 마천루에 닿기 때문이다. 그래도 어느 쪽에서 오르든 단풍 이파리들이 흩뿌린 선혈이 암봉마다 낭자한 풍광을 만날 수 있다.케이블카를 타고 바라본 대둔산의 단풍과 울퉁불퉁한 암릉◇금강구름다리, 삼선계단 너머 마천루까지 오르다대둔산은 남녀노소 누구나 편하게 오를 수 있는 산이다. 완주 쪽에서 협곡을 타고 오르는 케이블카가 등산로의 절반 이상을 가뿐하게 접어주기 때문이다. 대둔산이 사람들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은 케이블카가 놓이기 훨씬 전인 1972년부터. 아찔한 암봉 사이를 금강구름다리로 잇고, 경사도 51도의 가파른 암봉을 타고 오르는 아찔한 삼선계단이 놓인 뒤에야 대둔산을 오르는 길이 열렸기 때문이다.케이블카를 타고 상부 정류소에서 내려 정상까지는 700m 정도. 거리는 짧지만 가파른 계단으로 이루어진 오르막길이다. 여기서 10분 정도면 붉은색 금강구름다리에 닿는다. 지상으로부터 80m 정도 높이에 있는 구름다리는 중앙으로 갈수록 흔들림이 더 많아지고 고도감도 절정에 이른다. 구름다리에서 정상 방향으로 길을 이으면 구름다리보다 더 무섭다는 삼선줄계단이 기다리고 있다. 바위 벼랑을 이은 철계단 오르막인데 사다리처럼 가파르고 아래는 천길 낭떠러지라 오금이 저릴 정도다.여기까지 가는 길은 대둔산 단풍 불길이 활활 타오르고 있는 모습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구간이다. 특히 대둔산의 단풍을 이름나게 한 것은 치솟은 암봉이다. 거대한 직벽의 암봉에 선혈이 새어나온 듯 불붙은 단풍의 색감은 농염하기 이를 데 없다.삼선계단에서 마천대까지는 30분 정도면 오른다. 가파른 산길이라 노약자에게는 힘든 코스이지만, 종종 어린아이를 동반한 등반객과 나이 지긋하신 분들의 모습도 보인다. 커다란 개척탑, 즉 마천대가 보이면 정상에 도착했다는 의미다. 대둔산 정상 마천대에 서면 조망이 빼어나다. 정상에서 내려다본 금강구름다리는 기암절경과 함께 어우러진 단풍이 한 폭의 동양화를 연상케 할 정도다.안도현 시인이 ‘구름 속에 주춧돌을 놓은 잘 늙은 절’이라고 표현한 화암사의 우화루◇구름 속에 주춧돌을 놓은 잘 늙은 절왁자한 대둔산의 소란스러움에 취해보았다면, 이제는 차분하고 적막한 풍경을 찾아 나설 차례다. 대둔산 인근에서 그런 정취가 가장 잘 어울리는 곳이 화암사다. 불명산 자락에 있는 화암사는 조선시대에 지어진 사찰. 세월의 흐름을 멋지게 담고 있는 것으로도 유명하다.화암사가 유명해진 이유는 안도현 시인의 시 ‘화암사 내사랑’ 때문. ‘나 혼자 가끔은 펼쳐보고 싶은, 작지만 소중한 책 같은 절’이라고 시인이 소개했을 정도. 시인은 ‘구름한테 들키지 않으려고 구름 속에 주춧돌을 놓은 잘 늙은 절’이라고 화암사를 그려냈다. 이 시를 읽은 이들이 화암사를 찾아들며 세상에 존재가 알려졌다.들머리는 화암사 주차장. 이곳에서 자그마한 계곡을 따라 잰걸음으로 등산하듯 20여분 오르면 절집의 입구에 닿는다. 단풍 짙고 새소리 가득한 이 길에서는 가능한 보폭을 줄이고, 속도를 늦춰야 한다.화암사는 안도현 시인의 글처럼 ‘혼자 가끔 펼쳐보고 싶을’ 정도로 고즈넉하다. 우화루와 적묵당, 대웅전, 그리고 극락전의 높고 낮은 지붕선이 만들어내는 아늑함은 다른 사찰과는 남다르다. 그렇다고 건축물의 가치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화암사의 극락전은 국보로 지정됐을 정도. 신라시대에 창건한 건물이지만, 1605년(선조 38년)에 다시 지었다. 처마를 받치기 위해 하앙이라는 부재를 받쳐 놓은 독특한 건축양식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이곳에서만 볼 수 있다.화암사는 입구(口)자형이다. 우화루와 극락전이 남북으로, 불명당과 적묵당이 동서로 마주보고 있다. 극락전 왼쪽에는 ‘입을 놀리는 것을 삼가라’는 철영제가 있고, 적묵당 뒤편에는 산식각, 우화루 옆에 명부전이 자리하고 있다. 자연적인 지형을 최대한 이용해 조화를 이루도록 한 건축양식에 새삼 선인들의 슬기로움이 느껴질 정도다. 안도현 시인이 ‘구름 속에 주춧돌을 놓은 잘 늙은 절’이라고 표현한 화암사의 우화루
2020.11.13 I 강경록 기자
 한폭의 수묵화 그린듯, 달도 쉬어 가는 곳
  • [인싸핫플] 한폭의 수묵화 그린듯, 달도 쉬어 가는 곳
  • 한천팔경 중 제1경인 월류봉에 달이 흘러 가고 있다.[영동=글·사진 이데일리 강경록 기자] 충북 영동 황간 일대에는 수묵화같은 풍광 ‘한천팔경’이 있다. 한천팔경의 최고 절경으로 꼽히는 곳이 월류봉(月留峰)이다. 백화산 자락에서 발원한 석천과 민주지산 물한계곡을 이루는 초강천이 만나는 지점에 자리하고 있다. 깎아 세운 듯 층층이 솟아있는 봉우리와 그 아래를 휘감아 도는 맑은 물이 일품이다. 한 폭의 수묵화같은 월류봉 자락에는 화룡점정처럼 날아갈 듯 날렵한 정자가 세워져 있다.월류봉은 ‘한천팔경’ 중 제1경이다. 월류봉을 빼고 한천팔경의 나머지 일곱 곳은 사군봉, 산양벽, 용연대, 화헌악, 청학굴, 법존암, 한천정사 등이다. 하지만 자취도 희미하고, 감흥도 크게 일지 않는다. 아마도 옛 선비들이 한천팔경이란 명칭을 붙인 뜻이 오로지 월류봉에 있는 듯하다.해질무렵 바라본 월류봉과 월류정월류봉은 달이 능선을 따라 물 흐르듯 기운다는 모습에서 이름이 유래했다. 제1봉부터 5봉까지 모두 5개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다. 월류정 앞을 흐르는 초강천 건너편에서 바라보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풍광을 한눈에 담을 수 있다. 봄과 여름에는 신록이, 가을에는 울긋불긋 단풍의 모습이 있고 겨울에는 하얀 눈이 소복이 쌓여 있기도 해 계절에 따라 사시사철 각기 다른 모습을 볼 수 있다. 하루 동안에도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새벽 시간의 풍경부터 해의 방향에 따라 오전 및 오후 늦은 시간, 그리고 달이 뜨는 저녁시간까지 각각 새로운 풍경을 보여주곤 한다.월류봉 주변으로는 둘레길도 있다. 시간과 체력이 허락한다면 1봉부터 5봉까지 다섯개의 봉우리 능선을 타며 산행을 해보는 것도 좋다. 정상의 높이가 그리 높진 않으나 생각보다 가파른 산이라 약간의 체력을 필요로 한다. 월류봉 정상에 다다르면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아래로는 한반도 모양의 특이한 지형도 볼 수 있다.월류봉 주변에는 우암 송시열 선생의 흔적인 한천정사와 송시열 유허비가 남아 있다. 한천정사는 우암 송시열 선생이 은거할 당시 학문을 닦고 후학을 길렀던 곳이다. 이러한 내용을 알리기 위해 세운 비석이 바로 송시열 유허비다. 월류봉을 위시한 한천팔경도 한천정사에서 이름을 따왔다고 한다. 월류봉 표지석 앞, 송시열 유허비 앞, 한천정사 앞에서 바라보는 월류봉의 풍경이 모두 제각각이다.새벽 무렵 월류봉에 걸려있는 달이 모습
2020.04.17 I 강경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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