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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도발에 우리 군도 즉각 응수했다. 한국군은 오후 2시47분 북한군 기지를 향해 50발의 대응 사격에 나섰다. 북한이 다시 사격을 재개하자 우리 군도 보복 사격에 나서면서 연평도 일대는 전쟁터가 됐다. 교전 중지가 이뤄진 오후 3시41분까지 북한군 170여발, 우리군 80여발의 포탄이 오갔다.
우리 군은 서해 5도 지역에 최고 수준의 국지도발 대비태세인 ‘진돗개 하나’를 발령했다. 첫 번째 포격이 일어난 지 4분만에 한국 공군의 KF-16 2대가 출격했다. 추가로 KF-16 2대와 F-15K 4대 등 8대 전투기가 연평도로 몰려들었다. 북한도 MiG-23과 경비정을 출격시켰다.
확전의 가능성을 둔 출격이었다. 실제로 당시 전투기들은 북한이 포탄 도발을 넘어 미사일 발사 징후가 보일 경우 정밀타격 임무를 갖고 있었다. 일촉측발의 상황에서 북한의 사격이 멈추면서 양 측의 충돌 공중전과 해상전까지는 비화되지 않았다.
우리 군 전사자는 서정우 병장과, 문광욱 이병이었다. 전역을 한 달 앞뒀던 서 병장은 휴가로 섬을 떠나려던 상태였으나 포격에 부대 복귀를 하다 2차 포격에 사망했다. 자대 배치를 받은 지 불과 12일이 된 문 이병 역시 작전 수행 중 포탄 파편에 전사했다. 두 사람은 사후 하사, 일병으로 각각 추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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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로도 우리 군은 여러 차례 인근 해상에서 작전을 전개했다. 북한도 해안포를 전진시키는 등 대응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포탄 발사 등의 직접적 대응은 회피하는 모습을 보였다. 더구나 북측은 금강산 관광 재개 회담이나 6자 회담 등도 제안하는 황당한 모습을 보였다. 우리 정부는 이에는 선을 그었다.
이후 유엔안전보장이사회가 소집됐지만 중국의 반대로 합의안이 도출되지 않았다. 연평도 포격전을 전쟁범죄로 묻기 위한 시도도 있었으나 국제형사재판소(ICC)는 고의적 민간인 공격을 입증하기 어렵다며 전쟁범죄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다.
2010년 당시에는 공식 명칭을 ‘연평도 포격 도발’로 규정했지만 ‘도발’의 주체가 북한이고 우리 군의 대응이 포함되지 않은 용어여서 명칭 변경 논의가 이어졌다. 결국 2021년 3월 국방부는 공식 명칭을 ‘연평도 포격전’으로 변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