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쌓이는 물량·쏟아지는 민원..설 앞둔 택배기사들의 눈물

명절 맞아 평소보다 물량 1.5배 늘어
공원형 아파트 단지, 택배차 진입 두고 갈등
임시 보관소 관리 부실해 택배 절도 빈번
"소비자와 노동자 간의 상생 꾀해야 해"
  • 등록 2024-02-07 오후 3:25:43

    수정 2024-02-07 오후 7:28:16

[이데일리 이영민 기자] 설 연휴를 앞두고 택배기사들은 쏟아지는 물량에 누구보다 긴 하루를 보내고 있다. 여기에 배송 관련 고객의 민원까지 더해지면서 업무 강도는 더 커지고 있다. 특히 최근 단지 내 차도를 없앤 아파트가 늘어나면서 입주민과 택배기사의 갈등이 심화하는 모양새다.

설 연휴에 배송될 택배상자가 성인 가슴 높이까지 도로에 쌓여 있다.(사진=이영민 기자)
7일 이데일리가 찾은 경기도 성남시의 한 아파트에는 설 연휴 전 배송된 택배가 줄지어 들어왔다. 서로 다른 물류 업체에서 온 택배 기사 6명은 오전 10시부터 2시간이 넘도록 각자의 차에서 수십개의 물건을 내렸다. 30년째 택배 배달업에 종사하고 있는 장인실(57)씨는 “오늘은 물건 수가 평소보다 3분의 1은 많은 것 같다”며 “무거운 물건을 계속 옮겨야 하니까 디스크나 어깨, 무릎을 다치는 사람이 많다”고 말했다. 장씨의 옆에서 구슬땀을 흘리며 일하던 정모(31)씨도 “명절이 끼어 있어서 택배가 1.5배 더 들어오고 있다”며 “신선식품이 많아서 신경이 쓰인다”고 말했다.

가뜩이나 많은 물량에 허덕이는 택배기사에게 공원형 아파트 단지는 더 큰 난관이다. 이들 아파트 단지의 주민들이 탑차가 단지로 들어올 경우 벽돌로 된 길이 망가지기 쉽고 차에 가린 아이들이 사고에 노출되기 쉽다는 이유를 들어 저상차로 배달을 하거나 집 앞까지 손수레로 배달해 달라는 요구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데일리가 찾은 아파트 단지 역시 같은 요구를 해 택배기사와 입주민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택배기사들은 저상차의 경우 한번에 실을 수 있는 화물량이 줄어서 배송시간이 길어지고 근골격계 질환이 생길 위험이 크다며 주민 측 요구를 거절했고 벌써 9개월째 정문 앞 택배보관용 천막에 배달을 하는 악순환이 이어지고 있다.

이날도 택배기사들은 아파트 정문 옆에 세워진 천막 안으로 물건을 실어 날랐다. 천막의 양옆에는 아파트의 동 숫자가 적힌 A4용지가 붙어 있었고 그 밑에는 해당 아파트로 배송된 택배상자가 쌓여 있었다. 일부 상자는 하루 전 내린 눈에 젖어 망가지거나 구석에 떨어져 있었다. 한 입주민은 5분 동안 택배를 찾다가 빈손으로 돌아갔다.

경기 성남시의 한 아파트의 주민이 임시 택배보관소에서 택배를 찾고 있다.(사진=이영민 기자)
더 큰 문제는 이러한 갈등이 장기화하면서 물품이 사라지는 등 택배기사와 주민 모두 피해를 입고 있다는 점이다. 택배기사인 정학진(56)씨는 “지난해 12월부터 한 달 동안 택배가 10개 넘게 없어져서 사비로 물어줬다”며 “어제는 천막에 설치된 CCTV 3개를 누가 훔쳐갔다”고 말했다. 8년 차 택배기사 김병섭(45)씨는 “오늘 아침에도 택배 하나가 사라졌다는 연락을 받았다”며 “밤 10시 이후에도 ‘물건을 못 찾겠다’, ‘내 물건을 어떻게 할 것이냐’고 전화하는데 회사의 불이익을 걱정하기 전에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하소연했다.

아파트 주민 이모(37)씨는 “지난 추석 때도 선물용 홍삼 택배 2개가 사라졌다”며 “분실사건이 비일비재하다”고 말했다. 같은 아파트에 사는 노모(69)씨도 “택배를 받으러 여기까지 와야 하니까 나이 든 사람들은 쉽지 않다”며 “양쪽이 서로 양보하면 좋겠다”고 한숨을 쉬며 말했다.

국토교통부는 2018년 아파트 지하주차장의 높이 기준을 2.7m 이상으로 높이며 이러한 갈등을 없애고자 했지만 새로운 규정은 법 시행 전 건설허가를 받은 아파트에 적용되지 않아 최근까지 같은 문제가 반복되고 있다.

이에 대해 이병훈 중앙대 사회학과 명예교수는 “노사관계는 제도화된 교섭이나 협의 틀이 있지만 소비자와 노동자의 갈등은 그렇지 않다”며 “입주민은 택배업체와의 거래관계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지만 택배 노동자는 대응하기 어려운 위치”라고 말했다 이어 “양쪽 모두 물류 서비스로 얻는 이익이 있는 만큼 상생할 길을 찾아야 한다”고 제언했다.

이데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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