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 죽이고 간첩으로 몬 벤처사업가, 14년만에 구속[그해 오늘]

대한민국 뒤흔들었던 ‘수지김 간첩조작 사건’ 전모 드러나
국가가 나서서 살인+자진 월북 시도를 납북 사건으로 조작
  • 등록 2022-11-13 오전 12:03:00

    수정 2022-11-13 오전 12:03:00

[이데일리 김영환 기자] 지난 2001년 11월13일. 유망 벤처기업의 대표가 자신의 부인을 살해한 혐의를 받아 검찰에 구속 기소됐다. 살해된 여성을 국가가 나서서 간첩으로 몰았던 ‘수지 김 간첩 조작 사건’의 핵심 인물 윤태식씨다.

윤태식씨(오른쪽)이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패스21’의 기술을 설명하고 있다.(사진=MBC 캡쳐)
중학교 중퇴 학력인 윤씨는 뚜렷한 직업을 가진 적이 없지만 특유의 사교술로 일약 성공한 벤처 사업가 자리에 올랐다. 사기죄로 복역 중 알게 된 안 모씨를 통해 96년 전직 국회의원 김 모 의원을 소개받으면서 청와대에까지 사업 수완을 발휘했다.

윤 씨는 지문인식기업을 인수해 ‘패스21’이라는 벤처기업을 창업하고 김 전 의원, 언론사 사장 등의 비호를 받으면서 사업을 일으켰다. 벤처기업 육성에 나섰던 김대중 전 대통령 앞에서 기술 시연을 했을 정도다.

그러나 윤씨는 살인자였다. 그런데 이력이 특이했다. 그는 안기부, 당시 국정원의 감시와 비호를 받고 있었다. 전두환 정부이던 1987년 국가가 나서서 윤씨를 간첩과 결혼했던 피해자로 둔갑시켰던 것이다.

사건의 시작은 일반적인 살인이었다. 윤씨는 사업자금 문제로 아내 김옥분씨와 다투다가 우발적으로 그녀를 살해했다. 겁을 먹은 윤씨는 싱가포르로 이동해 북한 대사관에 망명을 신청했다.

살인자 신분의 윤씨를 선전용으로 써먹을 수 없겠다 판단한 북한 대사관이 이를 거부했고 윤씨는 미국 대사관을 찾아갔지만 역시 쫓겨났다. 미국 대사관이 윤씨의 동태를 수상하게 여겨 한국 대사관에 연락하면서 한국 정부가 윤씨의 신병을 확보했다.

윤씨는 거짓말을 둘러댔다. 평범한 여성 김옥분씨를 여간첩 수지김으로 둔갑시켜 자신의 살인에 정당성을 부여하려고 했다. 북한 대사관을 제발로 찾아갔으면서 납치를 당했다고도 주장했다.

앞뒤가 맞지 않는 거짓말이라는 것을 한국 정부도 당연히 파악했지만 안기부는 말도 안 되는 시나리오를 짰다. 전두환 정권의 퇴진을 외치던 목소리가 드높던 때, 정부는 여간첩 사건을 만들어 국민들의 시선을 다른 곳에 돌리고자 했다.

당시 국가안전기획부장이던 장세동씨의 지휘로 살인 및 자진 월북 시도 사건이 하루아침에 납북 사건으로 조작됐다. 윤씨는 안기부로부터 귀국 후 처신까지 교육받으면서 당당하게 입국했다.

억울하게 살해당한 것으로도 모자라 간첩의 누명까지 썼던 김씨에게서 끝난 문제가 아니었다. 유가족들의 삶은 파멸했다. 김씨가 간첩이라는 사실을 종용당했고 고문을 당하며 세뇌를 받았다.

세간의 멸시 속에 유가족들은 일상이 파괴됐다. 형제자매들은 이혼을 당했고 그 자식들은 버려지기도 했다. 어머니는 실어증을 얻고 숨 죽인 채 살다가 김씨 피살 후 10년 만에 사망했다.

피해자 유가족은 악몽 같은 삶을 살았지만 윤씨는 안기부의 묵인과 도움을 받으면서 멋대로 살았다. 몇 차례 사기 혐의로 수감 생활을 했으나 살인죄에 대해서는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았다.

얌전히 살아도 모자랐을 판에, 윤씨는 방송 출연까지 하면서 성공한 사업가 행세를 했다. 사실 1987년의 홍콩에서는 윤씨가 살인범이라는 홍콩 정부와 언론의 발표가 나왔다. 통신망이 현재 같지 않던 상황이어서 국내에 알려지지 않았던 것뿐이다.

윤씨의 모습을 본 유가족들이 진실규명을 위해 노력한 끝에 결국 안기부의 공작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당시 유가족을 무료 변론했던 이가 전해철 더불어민주당 의원이다. 검찰은 공소시효 만료를 50일 남겨두고 간신히 윤씨를 구속해 국가기관의 개입을 밝혀냈다.

윤씨는 살인죄로 12년, 여타 비리로 3년 6개월 등 도합 15년6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법원은 국가에도 42억원의 배상금을 유족에게 지급하라고 명령했다. 유례가 드물 정도로 큰 액수의 배상금이었다. 장세동씨에게 구상권이 청구돼 9억원의 배상금이 판시됐으나 장씨는 일부만을 납부했다.

국정원의 위신도 땅에 떨어졌다. 국정원은 2003년 8월 21일 “고인의 명복을 빌며, 안전기획부가 사건을 조작한 데 대해 공식적으로 사과한다”고 고개를 숙였다. 사건을 조작했던 관련자들은 공소시효 만료로 책임을 지지 않았다. 윤씨는 2017년 4월 26일 만기출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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