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김영환 기자] 1976년 8월18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에서 `도끼만행사건`이 벌어졌다. 미루나무 가지를 자르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북한군이 유엔(UN)군 장교를 사망케 한 사건으로, 한국전쟁 휴전 이후 한반도 내 군사적 긴장감이 가장 높아졌다.
| 북한군들이 1976년 8월 18일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 당시 JSA 모습.(사진=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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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오전 JSA UN군 제3초소 앞에서 UN군 11명의 호위 아래 한국인 노무자 5명이 미루나무 가지를 쳐내고 있었다. 관측소의 시야 확보를 위해 풍성해진 나무를 자르려고 한 것이다.
이때 북한군 10여 명이 나타나 이를 방해하며 대치했다. UN군은 작업을 이어나갔고 이후 20여 명의 북한군이 도끼 등의 무기를 갖추고 더 합류했다. 이들은 당시 현장을 지휘하고 있던 미국군 장교 보니파스 대위와 바레트 중위를 도끼로 살해했다. 단 4분만에 벌어진 참극이었다.
미국과 한국이 발칵 뒤집혔다. 사건 직후 주한미군 사령관 리처드 스틸웰은 일본에서 전투기를 타고 급거 한국으로 돌아와 박정희 대통령을 만나 `데프콘3` 발동에 합의했다.
한국전쟁 이후 `데프콘3`가 발령된 것은 처음으로, 사실상 준전시체제에 돌입한 것이다. 북한도 사건의 책임을 상대에게 돌리면서 전시태세에 돌입했다. 미군이 먼저 도끼를 던졌다면서 적반하장으로 맞섰다.
미국은 문제가 된 미루나무를 제거하는 `폴 버니언` 작전을 통해 전쟁을 준비했다. 미국 본토와 괌, 오키나와 등에서 전투기와 항공모함 등 전력을 한반도에 배치했다. 미루나무 절단 중 북한이 교전 의지를 보일 경우 JSA를 넘어 북한을 타격하겠다는 계획이었다.
북한은 미국의 대규모 화력 시위에 한발뒤로 물러섰다. 미루나무 절단 자체를 지켜보기만 했으며 한국군이 북한군 초소를 공격하는데도 도망치기에 바빴다. 소련과 중국 등 당시 공산권 국가도 `미국`을 넘어 `UN`을 공격한 북한과 거리를 뒀다.
결국 북한은 미국에게 `비밀회담`을 요청하고 김일성이 `유감 표명` 편지를 낭독하면서 위기가 해소됐다. 북한이 항전 의지를 보이지 않은 데다 김일성이 유감을 표명하면서 미군은 작전을 종결지었다.
| (사진=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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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을 계기로 JSA 경비 초소는 확실한 경계를 세우고 남과 북의 분할경비로 바뀌었다. 여담으로 문재인 전 대통령이 당시 북한 초소를 공격했던 특전사 제1공수 특전여단 소속으로 작전에 투입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