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장 절망적이었던 것은 이런 일을 당해도 어디 하나 내 편이 없다는 것이었다. 아무런 효과 없는 성희롱 교육 같은 거 말고 실질적 해결 방안이 있어야 한다.”(B공기업 직원)
최근 직장인 전용 익명 커뮤니티 ‘블라인드’에 올라온 글이다. ‘블라인드’는 서지현 검사 커밍아웃 직후 직장 내 성폭력 제보 글이 잇따르면서 지난 1일 ‘미투’(Me too·나도 당했다) 게시판을 별도로 열었다. 게시판 오픈 만 하루만에 참여 글이 400건을 돌파하는 등 기업 내 성추행·성희롱 피해 고발이 줄을 잇는 모양새다. 블라인드에 따르면 올라오는 제보 글만 2분당 1개꼴. 이 커뮤니티에는 약 2만5000개 기업에서 일하는 130만명 이상의 직장인이 가입해 있다.
△대기업 ‘성추문=전사적 리스크’로 분리
각 기업에서도 사내 성희롱·성추행 문제를 ‘전사적 리스크’로 인식하면서 예방과 처벌을 강화하는 추세다. 과거와 달리 사내 성 추문을 직장 내 갑질을 넘어 5대(성추문·자살·과음·폭언·폭행) 악(惡)으로 보고 무관용·무자비 원칙으로 엄격히 다루고 있다는 게 기업들의 설명이다.
SK이노베이션은 2000년대 중반부터 ‘원스트라이크 아웃, 노 머시’(One Strike Out, No Mercy) 제도를 도입해 운영 중이다. 주관부서는 인력개발팀&하모니아로 외부 전문 상담인력이 맡고 있다. 성희롱에 대한 신고가 접수되면 그날 바로 진상조사위원회가 꾸려지는 식이다. 진상조사위에는 여성 변호사 1인 이상이 참석해 사건을 객관적으로 판단하도록 했다. 피해가 인정되면 인사위원회(상벌위원회)에서 가차 없이 퇴사 등 중징계를 내린다.
|
남성 직원이 여성 직원보다 월등히 많은 현대중공업도 과거보다 성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추세다. 혐의가 인정되면 피해자 의견을 적극 반영해 필요한 조처를 취한다. 예방은 물론 사후 조치에도 힘쓰고 있다. 재발방지대책 수립 및 피해자 심리 치료 등을 지원한다. 인사위원회 운영규정상 징계양정 기준도 ‘상대편의 의사에 관계 없이 성적으로 수치심을 주는 말이나 행동을 할 때, 고의과실여부를 불문하고 견책, 해고까지 가능’하도록 규정했다.
한화그룹은 2015년부터 성희롱 예방 카운슬러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본사 및 각 사업장별 남녀 1명씩 총 12명으로 구성했으며 사건 발생 시 피해자의 요구에 따라 상담 혹은 신고를 결정하게 된다.
포스코 역시 2009년부터 별도 조직인 정도경영실(감사실) 내 상담센터를 두고 있다. 사규에 성희롱 예방지침을 두고 ‘원스트라이크 아웃제’를 시행 중이다. LG그룹도 성희롱, 성추행 등을 ‘LG 윤리규범’ 위반행위로 규정, 진상조사와 징계위원회 개최 등에 따라 최대한 신속히 처리한다.
하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는 게 기업 안팎의 분위기다. 대기업 외에 중소기업에서는 직장 내 성추문 매뉴얼조차 제대로 마련된 곳이 많지 않아서다. ‘직장 내 성폭력’은 오랫동안 지적돼 온 문제지만 정부 규정도 연 1회 이상 교육이나 강연에 머물러 있다.
재계 한 관계자는 “피해가 인정되면 중징계를 내린다고 하지만 피해 사실을 밝혀내기 전까지 너무 많은 수고와 시간이 필요하다. 때문에 피해자들은 공개적으로 문제 삼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경영진이 성범죄를 미숙하게 처리할 경우 유능한 인재들의 불신은 커지고, 기업의 장기 경쟁력마저 갉아먹는다”며 “방관자가 아니라 방어자로 나서는 게 옳고 좋은 일이라는 사내 분위기를 조성해야 한다”고 귀띔했다.
다만 “정부가 5월부터 성희롱 예방교육 시 매뉴얼을 마련하지 않은 사업주에게 과태료 500만 원을 부과하는 등 남성들에게까지 미투 운동이 확산되고 있는 만큼 기업내 인식도 빠르게 변화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