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가는 지하철 안에서도 이들은 내내 시끄러웠다. 한 명이 앞장 서 소리를 지르면 뒤따라 소리를 지르는 형태였다. 양 볼과 코끝이 얼큰하게 물든 덩치큰 남성들이다보니 곁에 있는 사람들은 위협감을 느낄 정도다.
몇몇은 집에 가지 않고 주변 펍, 식당가를 향했다. 그 곳에서 같은 팀을 응원한 동료들과 한 잔을 나눴다. 축구는 이들에게 ‘낮술’을 마실 수 있는 핑계이자 삶의 낙인 셈이다. 이들에게 있어 내가 응원하는 팀이 이기는 날이 축제날이다.
많은 이들이 익히 알고 있다시피, 잉글랜드 축구 광팬은 전 유럽에서도 유명하다. 월드컵 혹은 챔피언스리그 같은 국가 대항전에서 잉글랜드 훌리건은 경계의 대상이기도 하다. 평소에는 얌전해 보이다가도 언제든 돌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상대 팬에 대해서는 과격한 언사도 서슴지 않는다. 한국의 프로축구 서포터들의 과격 행동이 가끔 뉴스에 오르내릴 때가 있다. 하지만 이들만큼 무섭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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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의 경기는 이미 런던 내 신문과 방송으로부터 높은 관심을 받았다. 럭비, 평창올림픽에 이은 3번째 꼭지로 북런던 더비 소식이 나왔지만 스포츠 뉴스 시간만 되면 양 팀의 선수 상태와 감독 인터뷰가 나왔다.
경기 시작 전 감도는 전운
웸블리파크 역에서 웸블리 구장까지는 약 300~400m 정도 걸어가야 했다. 경기 시작 2시간 전인데, 이 길은 이미 사람들로 꽉 찼다. 대부분 토트넘 팬들이었다. 원정팀 아스널 팬들은 보이지 않았다. 아스널 특유의 붉은 색 유니폼을 입고 왔어도, 두꺼운 외투 속에 숨겨 놓았을 것이다.
경기장 안에는 청년부터 중년에 이르는 축구팬들이 들어와 있었다. 우리나라와 다른 점은 구매력 있는 남성 팬이 대부분이라는 점이다. 티켓 값이 각 경기장과 경기 별로 다르고 비싸다보니 학생 혼자서 티켓을 구매하기 힘들다. 이곳 런던 거주민들도 자기가 좋아하는 팀 경기라도 해도 큰 맘 먹고 와야 한다. 맨체스터유나이티드나 첼시 등 명문 구단의 빅게임 티켓을 구매한 이들은 부러움의 대상이기도 하다.
웸블리 구장 안쪽 전광판에서 토트넘 대표 선수들의 얼굴이 나왔다. 해리 케인의 얼굴이 나오자 관중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EPL 최고 득점 선수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케인은 토트넘의 영웅이다. 이날 유일한 결승골도 케인의 헤딩으로 들어갔다.
경기 시작 30분여전인 정오가 되자 본격적인 전운이 감돌았다. 원정 아스널 팬들이 골대 뒷편 한 켠에 자리 잡자 경기 진행요원들과 경찰이 이들을 둘러쌌다. 홈 팬들과의 경계선을 명확히 했다. 아스널 팬들이 구호를 외치고 응원가를 부르자 토트넘 팬들은 바로 야유를 보냈다. 중년 토트넘 팬이 욕설로 들리는 말을 익살스럽게 했다. 주변 관중들 모두가 다 웃었다.
경기 시작 전 박지성이 전광판에 모습을 드러냈다. 손흥민에 직접 AFC 아시아 국제 선수상을 수여하기 위해 나타난 것. 사회자의 공지와 함께 짤막한 손흥민의 소감이 전광판에 나왔다. 토트넘 관중들은 박수로 화답했다. 약 8만여 관중 앞에서 한국 축구 레전드의 이름이 빛난 셈.
토트넘 팬들은 경기 중간중간 아스널 팬들에 대한 야유를 잊지 않았다. 아스널을 지독히 싫어하는 토트넘 팬들의 감정이 실린 응원가가 나왔다. 얼큰하게 취한 한 중년 남성이 큰 소리로 욕을 하며 가운데 손가락을 올려 보이기도 했다.
손흥민 선수는 부지런히 왼쪽 측면을 공략했다. 손흥민은 토트넘의 주요 공격 루트이기도 했다. 하지만 아스널 수비진도 세계적인 선수들인지라 쉬이 뚫리지 않았다. 수 차례 공격이 무위로 끝났고, 후반 교체 전 슈팅까지 날려보았지만 허사였다. 그래도 토트넘 팬들은 교체돼 나가는 손흥민을 박수로 격려했다.
경기후, 빠져나가는 데만 1시간
경기가 끝나자 8만 관중이 한꺼번에 나왔다. 경기 시작 수 시간전부터 입장했던 관중들이 한꺼번에 나가다보니 웬블리 구장 주변은 인파로 빽빽했다. 웸블리파크역으로가는 데만 20분 넘게 걸렸다. 중간중간 ‘위너 원’이라는 힘찬 함성이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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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분여 지나자 경찰이 역 문을 개방했다. 앞서 온 관중들이 다 빠져나가자 통제를 푼 것 같았다. 20분여를 차가운 빗속에서 기다렸던 이들은 경찰들에 야유를 했다. 익살스런 표현인듯 했다. 경찰들도 씨익 웃을 뿐 별 말을 하지 않았다.
축구 경기 = 지역축제, EPL 만드는 힘
잉글리시프리미어리그(EPL)이 강한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은 경기를 보는 이들이 많다. 관심이 뜨겁다는 얘기다. 전세계 관심이 모이다보니 TV를 통한 중계권료 시장이 엄청나다.
이날 경기에도 8만 관중이 들어가는 웸블리 구장이 가득 찼다. 그만큼 관심이 높다는 것. 영국 사람들은 영국내 자기 고장 팀에 대한 애정이 높다. 구매력 높은 이들을 통해서만도 구단은 먹고 산다.
지난 2016-2017년 중계권료 수익에서 지난해 리그 우승팀 첼시는 1억5280만파운드(약 2285억원)를 기록했다. 북런던에서 아스널과 좌웅을 겨루는 토트넘이 3위였다. 1억4810만 파운드. 20위 선더랜드의 중계권료가 9990만파운드였다. 하위팀마저도 대규모 중계권 수익을 올리는 구조다. 하위팀도 만만치 않으니 EPL은 매 경기가 흥미진진하다. 소수 명문 구단이 리그를 이끄는 유럽 다른 리그와는 다른 점이다.
이런 중계권 수익을 올릴 수 있는 점도 결국은 팬덤이 바탕이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이어지는 팬덤 문화다. 매 경기마다 수만의 관중이 구름처럼 몰려드다보면 자연스럽게 프로구단의 수익이 늘고, 이는 경기 수준의 상승으로 이어진다.
한국은 가능할까. 아시아에서 아시아챔피언스리그를 수차례 재패할 정도로 K리그는 수준이 높다. 2002년 월드컵 이후로 프로축구 인프라가 개선됐다고 해도 우리 관중석은 아직 초라한 경우가 많다. 공영방송에서 어쩌다 가끔 K리그 경기 중계를 볼 뿐이다. 아쉬움을 뒤로하며 한국에서는 꼭 아들과 함께 경기장을 찾으리라 다짐했다. 언젠가는 K리그도 아시아의 EPL이 될 것이라는 기대감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