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완성이거나 무의식이거나…추상하는 습관[이수연의 아트버스]<14>

▲아실 고르키 '전통을 존중한 혁신'
인물보다 심리묘사 치중한 '화가와 어머니'
고향 향한 채우지 못한 그리움 '미완'으로
세잔·피카소 등 대가화풍 섭렵해 스타일화
기억·감정의 개념, '추상'이란 그릇에 녹여
감각·즉흥적 회화, 미국식 아방가르드 상징
  • 등록 2022-07-22 오전 12:01:01

    수정 2022-07-27 오후 7:22:36

아실 고르키의 ‘화가와 그의 어머니’(1926∼1936). 고르키 나이 22세에 시작한 작품은 장장 10년에 걸쳐 이어졌다. 1912년 여덟 살 때 고향 아르메니아에서 어머니와 찍은, 비슷한 구도의 사진을 원본으로 삼았다. 작품에서 유독 눈에 띄는 건 어머니의 옷과 손이다. 꽃무늬가 빽빽하던 사진 속 옷은 흰색으로 거칠게 칠해놓고 손은 붕대를 칭칭 감은 듯 둥그런 원으로만 묘사했다. 이를 두고 후대는 10년이 걸려도 미완으로 남길 만큼 채우지 못한, 특히 ‘잡을 수 없는 손’에 대한 그리움이라고 말한다. 캔버스에 유채, 152.4×127.6㎝, 미국 뉴욕 휘트니미술관 소장.


까마득히 오래전, 이름도 모르는 누군가가 그린 동굴벽화에서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예술의 기원’이란 것을 말입니다. 문자를 대신한 소통이 예술의 목적, 그 전부였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내 예술은, 또 미술은 다른 날개를 달기 시작했습니다. 종교를 달고, 휴머니즘을 달고, 상상력을 달았습니다. 20세기쯤 오자 미래를 내다보는 데까지 이르렀습니다. 과학과 기술을 딛고 서서 인간의 꿈이 도달할 그 너머를 꿈꿨던 겁니다. 이제 현대미술은 영역의 한계를 두지 않습니다. NFT에다가 메타버스에까지 닿아 있지 않습니까. 오랜시간 현대미술의 진격을 지켜봐온 이수연 학예연구사가 이데일리와 함께, 그 지점 그 장면을 들여다봅니다. 과학기술과 문명의 발달로 비로소 가능했던, 예술의 창조적인 경계의 확장을 가져온 미술거장의 삶과 작품 읽기를 통해 예술로 꾸는 꿈과 희망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매주 금요일 독자 여러분을 그 드넓은 ‘아트버스’의 세계로 안내합니다. <편집자 주>


[이수연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20세기 예술에서 ‘아방가르드’(Avant-Garde)는 신의 명령과 같은 단어다. 본래 전투에서 맨앞에 서는 전위대를 뜻하는 군대용어였지만, 19세기 말 미술계로 들어오면서 전통과 관습, 고정관념을 해체하는 전위적이고 급진적인 예술을 뜻하는 말로 자리잡았다. 아방가르드란 용어를 처음 사용하기 시작한 지식인 중 한 사람인 생 시몽(1760∼1825)은 전위적인 예술이 새로운 아이디어를 사회에 퍼트릴 수 있는 도구라고 생각했고, 또 그것이 예술의 성스러운 미션이라고 굳게 믿었다. 생 시몽을 비롯해 아방가르드를 열렬하게 추종한 이들에게 예술에서 중요한 것은 첫째도 혁신, 둘째도 혁신이었다. 그 혁신은 다름 아닌 예술가의 아이디어와 사회·예술의 변혁을 향한 끊임없는 노력에서 나온다고 여겼다.

20세기 미술은 바로 그 ‘혁신’에서 큰 힘을 받았다. 작가의 아이디어와 독창성을 주요 척도로 삼고 새로운 생각과 표현방식을 찾아다녔다. 그런 점에서 20세기 아방가르드의 주요 흐름 중 하나인 추상표현주의의 거장 아실 고르키(1904∼1948)의 행적은 상당히 독특하다고 할 수 있다. 터키령 아르메니아에서 태어나 10대에 ‘아르메니아 대학살’을 피해 미국으로 이주한 고르키는 보스턴·뉴욕 등에서 인상주의, 후기 인상주의, 큐비즘, 초현실주의의 영향을 받으며 자신의 스타일을 발전시켜 나갔다. 1920∼1930년대 국립디자인학교와 그랜드센트럴예술학교를 다닐 당시에는 당대 작가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르네상스화가 파올로 우첼로의 스타일까지 연구했다. 우첼로는 1세기경 로마와 이집트 전역에 널리 퍼져 있던 파이윰 미라의 초상화나 원근법을 연구했던 인물이다.

고르키의 이런 방식은 아방가르드의 새로움과 독창성을 좇던 작가들에겐 상당히 낯선 방식이었는데, 고르키는 동료들의 비판에 대해 화법을 연구하고 미술사의 연속성 측면에서 전통을 아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10대 후반에야 미국에 온전히 정착한 탓에 미술관과 갤러리에 걸린 대가의 작품들을 보며 미술을 독학하다시피 한 고르키 입장에서 전통은 타파의 대상이 아니라 존중하고 계승해야 할 대상이었던 것이다.

후기인상주의 세잔 영향 받은 ‘배, 복숭아와 물병’

고르키의 초기작 ‘배, 복숭아와 물병’(1927)은 본격적인 첫 독학 스승이었던 후기인상주의자 폴 세잔(1839∼1906)의 영향을 잘 보여준다. 2차원 공간에 서로 다른 시점으로 어색하게 자리잡은 배와 복숭아, 또 그 그림자의 미묘한 관계를 탐구했던 세잔의 스타일을 놀랍도록 정교하게 모방한 작품은 고르키가 이 대가의 화풍뿐만 아니라 생각까지 완전히 흡수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아실 고르키의 ‘배, 복숭아와 물병’(1927). 폴 세잔의 영향을 받은 초기의 정물화다. 세잔의 화풍을 흡수해 자연물의 원형을 조합, 내적인 세계를 표현하고자 했다. 캔버스에 유채, 43.8×60.0㎝, 미국 보스턴 록스버리 셔먼 컬렉션 소장.


세잔을 온전히 터득한 후 고르키는 파블로 피카소(1881∼1973)로 옮겨갔는데, 특히 피카소가 큐비즘 회화에서 캔버스 표면을 현실의 공간이 아닌 2차원 평면으로 인식했던 것에 관심을 뒀다. 르네상스 이후 수많은 화가들은 과학적 원근법을 이용해 현실의 공간을 마치 마법처럼 그려내고 싶어했다. 큐비즘은 그러한 거짓된 환영을 걷어내고 캔버스에 단순하고, 즉흥적이며, 마음을 그대로 반영한 공간을 만들어내고자 했던 것이다. 고르키는 바로 이런 회화의 새로운 공간, 추상의 공간에 빠져 들어갔고,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 “추상은 우리에게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마음으로 볼 수 있게 한다. 추상미술은 예술가에게 감지할 수 있는 세상 너머, 유한 바깥의 무한을 바라볼 수 있게 해준다. 이것은 정신의 해방이고, 미지 영역으로의 폭발이다.”

고르키에게서 공간의 해방을 가져온 추상미술은 다른 무엇보다도 자신의 눈과 감각, 마음과 기억을 탐구하게 한 영역이었다. 특히 어린 시절에 겪은, 어머니를 잃고 고향을 등져야 했던 ‘아르메니아 대학살’이 평생 그를 지배했는데, 다른 어떤 사실적인 이미지보다 더욱 생생한 마음의 이미지를 어떻게 예술로 표현해낼 수 있을 것인가가 관건이었던 것이다.

오랜 시간에 걸쳐 그린 ‘화가와 그의 어머니’(1926∼1936)에는 평평한 몸을 가진 예술가와 그의 어머니가 함께 자리하고 있다. 사진을 보고 그린 작품이지만 사진묘사보다는 두 인물의 심리묘사에 초점을 맞춰, 마치 그의 기억처럼 미완성으로 남아 있다. 이 작품을 두고 고르키는 아르메니아에 대한 기억과 그리움이 형태와 모양으로 바뀌어 예술탐구의 길을 개척할 수 있게 한다고도 했다.

이후 고르키는 1930년대 후반부터 1940년대에 본격적으로 기억과 심리를 다루는 초현실주의자들을 만나면서 비로소 추상미술로 자신의 화풍을 정립해나가기 시작한다. 그 과정에서 큰 영향을 받은 작가가 호안 미로(1893∼1983)인데, 자유롭게 흘러다니는 선과 형태, 강렬한 색감이 무의식과 닿아 시적 추상을 완성해내기에 이른 것이다.

초현실주의 정점 ‘간은 닭의 볏이다’…관능적 색채·붓질

그즈음의 작품 ‘간은 닭의 볏이다’(1944)는 20세기 초현실주의를 대표하는 시인이자 평론가였던 앙드레 브르통(1896∼1966)이 “초현실주의의 정점에 선 작품”이라고 극찬해마지 않던 걸작이다. 관능적인 색채와 붓질로 남녀의 성기, 혈관, 깃털, 계란, 벌레, 수탉 등 의미가 이어지지 않는 사물을 붉은 갈색 톤이 얼룩진 공간에 의미 없이 떠다니게 한 이 작업은 감정과 기억에 의해 걸러진 실재가 얼마나 변덕스럽고 자유로운지 일깨워 준다. 회화는 비로소 추상이란 그릇에 기억·감정 같은 흘러다니는 개념을 담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작품명까지 지극히 추상적이다. 간(liver)은 본래 사랑과 욕망을 관장하는 기관으로 알려져 있는데, 철자가 ‘산다’(live)를 떠올리게 하고 닭의 볏(cock’s comb)과도 연결되면서 ‘인생은 헛되고 허무하다’란 의미를 상징한다는 설명이 나오기도 했다.

아실 고르키의 ‘간은 닭의 볏이다’(1944). 자연과 신체, 어린시절 아버지의 옛 정원에 대한 기억을 토대로 인생의 복잡성과 모순을 그림과 제목에 여러 겹 녹여냈다. 파블로 피카소, 바실리 칸딘스키, 호안 미로 등의 작품에서 보이는 요소들을 혼합하고 있다. 캔버스에 유화, 186.0×249.8㎝, 미국 버팔로 올브라이트-녹스아트갤러리 소장.


세계대전 후 유럽과 미국을 잇는 가교로, 수많은 대가의 스타일을 섭렵해 자신의 작품세계를 만들어낸 고르키는 유럽 최후의 초현실주의자이자 미국 최초의 추상표현주의자라고 불리기도 한다. 감각적이고 즉흥적이며 지극히 주관적인 고르키의 회화는 미국적인 아방가르드를 상징하는 추상표현주의가 앞으로 얼마나 자유롭고 대담한 이미지를 만들어낼 것인가를 미리 보여줬고, 회화가 얼마나 역동적인 에너지를 뿜어낼 수 있을 것인가의 가능성도 보여줬다.

고르키의 회화에서 나타나는 색채와 선의 힘이 유럽의 오래된 회화기법을 지켜보고 연마해 얻어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오늘의 예술이란 것은 지난 세기 거인의 어깨를 밟고 선 것이란 걸 새삼 깨닫게 된다. 그렇기에 고르키는 예술을 ‘사랑’으로 표현하며 그 사랑을 물려받고, 물려주는 것에 진지해야 한다고 강조했는가 보다.

※ 추상표현주의

2차대전이 끝나고 미국 뉴욕을 중심으로 전개된 미술사조로 1950년대 미국 추상회화 전반을 가리키기도 한다. 추상표현주의란 말은 1946년 한스 호프만의 전시에서 처음 사용했다. 자유로운 기법과 자발적인 방식으로 개인의 감정 표현을 강조했고, 대형화면에 마음을 사로잡는 시각적 효과를 배치하는 것도 특징이다. 한스 호프만, 아실 고르키 등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건너간 유럽의 초현실주의자, 전위예술가가 추상표현주의의 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이후 캔버스에 물감을 뿌리거나 쏟아부어 나오는 우연성에 기댄 ‘액션페인팅’의 잭슨 폴락, 억제하고 절제한 감정을 색으로 드러내는 ‘색면추상’의 마크 로스코 등으로 이어졌다.

△이수연 학예연구사는…

1979년 생. ‘문자보다 이미지’였다. 이미지의 가능성, 이미지를 읽어내는 방식에 자꾸 관심이 갔다.서울대 언어학과를 졸업한 뒤 방향을 틀었다.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미술사를 공부하고 ‘백남준 퍼포먼스 연구’란 결과물을 만들었다. 이후 미술전문기획사 사무소(SAMUSO) 등을 거쳐 2008년부터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로 일하면서 전문영역이 선명해졌다. 무빙이미지·영화·인터넷 등 미디어기술의 발전이 미술과 어떤 관계를 맺고,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파고든 일이다. 내친김에 미국 코넬대 미술사학과 박사과정에 진학해 미디어기술을 입은 시각문화가 끝없이 진화하는 현장을 학술연구와 연결하는 일에까지 욕심을 냈다. 백남준 탄생 90주년, 국립현대미술관이 올 가을에 열 ‘백남준 효과’ 전 준비에 여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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