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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정부는 중국 북경에서 북한과 연 쌀 지원 회담에서 우성호와 선원의 송환을 요구했다. 북한 대응은 오락가락이었다. 북한은 9월 “(우성호를) 공화국 법대로 처리할 것”이라고 밝혔다. 우성호를 나포한 지 4개월 만에 첫 공식 언급이었고, 형식도 중앙통신 보도를 통해서였다. 송환에 응하다가, 거부하고, 다시 응하기를 반복했다. 최종 송환 대상은 선박을 제외한 선원 전원이었다.
이 시기를 북한은 ‘고난의 행군’이라고 칭한다. ‘당원과 인민군 장병, 인민은 고난의 행군정신으로 살며 싸워나가야 한다’(1996년 북한 신년사)는 것이다. 시기적으로는 거대한 수해가 일어나고 고난의 행군을 선포하기 직전이었고, 외교적으로는 외부 지원이 절실한 상황이었다. 이번 고비를 넘기지 못하면 북한 체제가 지속하리라고 장담하기도 어려웠다. 소련도 붕괴한 마당이었다.
북한이 우성호 송환으로써 한국 정부에 내민 유화한 손길의 배경에는 복합적인 사정이 숨겨져 있었다. 실제로 북한은 쌀회담이 이뤄지는 과정에서 우성호 송환을 조건으로 추가 지원을 제안하기를 반복했다. 북한이 우성호를 송환하지 않은 걸 보면 애가 닳은 속내를 읽을 수 있다. 포격으로 손상한 선체가 공개돼 남한 여론이 부정적으로 흘러 대북 지원이 무산·축소될 것을 우려한 것으로 풀이된다.
이런 와중에 북미가 1995년 11월 미국에서 극비로 접촉하고 우성호 송환에 합의한 것으로 드러났다. 한국의 외교력이라기보다 북미 간 직접 대화를 거쳐 우성호 선원이 귀환한 것으로 볼 여지가 있었다. 양국의 극비 그리고 직접 대화에서 한국은 소외됐다. 이런 상황에서도 한국 정부가 북한에 인도적인 쌀 지원을 지속해야 하는지를 두고 여론이 분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