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살아간다"..서울대생 할복 자살[그해 오늘]

서울 농대생 김상진, 1975년 4월 11일 교정서 '양심선언문' 낭독 후 할복
유신 체제 및 긴급 조치 항거...구급차 실려 가며 "애국가 불러 달라"
4월 12일 오전 사망...박정희 퇴진 요구한 '공개장'도 유서로 남겨
민주화 운동 더욱 거세져..유신 정권, 긴급조치 9호 발동으로 탄...
  • 등록 2023-04-12 오전 12:03:00

    수정 2023-05-25 오후 11:06:07

[이데일리 이연호 기자] “민주주의란 나무는 피를 먹고 살아간다고 한다. 들으라! 동지여! 우리의 숭고한 피를 흩뿌려 이 땅에 영원한 민주주의의 푸른 잎사귀가 번성하도록 할 용기를 그대들은 주저하고 있는가! 들으라! 우리는 유신 헌법의 잔인한 폭력성을, 합법을 가장한 유신 헌법의 모든 부조리와 악을 고발한다. 우리는 유신 헌법의 비민주적 허위성을 고발한다. 우리는 유신 헌법의 자기중심적 이기성을 고발한다”
사진=사단법인 김상진기념사업회.
1975년 4월 11일 당시 경기도 수원시 소재 서울대 농과대학(현 농업생명과학대학) 축산학과 4학년 김상진 군은 이날 농대 교정에서 진행된 ‘구속 학생 석방 성토 대회’에서 세 번째 연사로 등장해 이 같은 내용의 ‘양심선언문’을 낭독한다.

성토 대회 일주일 전인 4월 4일 서울대 농대 학생들은 학원 자율화 및 언론 자유 문제에 대해 학생 총회를 열고 수원 시내까지 진출해 게릴라 식 시위를 전개했다. 이 사건으로 학생회장을 비롯한 복수의 학생들이 체포되자 11일 농대생 300여 명이 학교에 모여 성토 대회를 가진 것이다. 김 군의 양심선언문에서도 알 수 있듯 이날 대회는 유신 체제와 그 체제 하에서 발동된 여러 건의 긴급 조치에 항거하는 의미를 지녔다.

김 군은 양심선언문 발표를 끝낸 직후 돌연 미리 준비해 온 과도를 꺼내 할복을 한다. 피를 철철 흘리며 쓰러진 그는 앰뷸런스에 실려가며 학우들에게 “애국가를 불러 달라”고 한다. 친구들의 애국가를 들으며 혼수상태에 빠진 그는 이후 끝내 다시 눈을 뜨지 못했다. 병원으로 옮겨져 두 번의 수술을 받았으나 이튿날인 4월 12일 오전 8시 55분께 25세의 나이로 숨졌다.

그는 11일 할복 전, 미리 작성한 ‘양심 선언문’과 ‘대통령께 드리는 공개장’의 2개 문서를 낭독해 녹음한 뒤 그 테이프를 한 방송국에 보냈다. 그의 유언인 셈이었다. ‘대통령께 드리는 공개장’에서는 “위대한 지도자의 진정한 용기는 영광의 퇴진을 위한 숭고한 결단에 있다고 저는 확신합니다”라며 박정희 당시 대통령의 퇴진을 정중히 요구했다.

전직 대통령이었던 야당 지도자 윤보선은 당시 김 군의 공개장에 대해 “김상진 군은 대통령께 드리는 공개장을 유서로 남겼는데, 그 내용이 논리정연하고 위정자의 오류와 잘못을 세련된 문장으로 지적하였다. 결코 감정을 앞세운 글이 아니라 사려 깊은 논리와 투철한 민주주의 신념으로 가득찬 애국적 충고문이었다”라고 평했다. 그러면서 “학우들의 애국가를 들으며 혼수상태에 빠졌던 그는 끝내 돌아오지 않는 민주 학생이 되고 말았다”고 탄식했다.

김 군의 할복 사건을 계기로 유신 헌법 철폐와 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민주화 운동은 더욱 거세졌다. 그러자 당시 박 대통령은 같은 해 5월 13일 유신 헌법에 대한 일체의 언급이나 논의를 금지하는 내용의 ‘긴급 조치 9호’를 발동하기에 이른다. ‘긴급 조치 9호’는 이전까지 내린 일련의 긴급 조치 내용을 총괄하고 적용 범위를 확대한 긴급 조치의 결정판이었다. 1979년 12월 7일 긴급 조치 9호가 해제될 때까지 4년여 간 지속된 긴급 조치 9호의 시대는 민주주의의 암흑기로 평가 받는다. 이 시기 민주화 운동으로 800여 명의 구속자가 나오면서 운동권에선 ‘전 국토의 감옥화’, ‘전 국민의 죄수화’라는 말이 유행하기도 했다.

김 군의 할복 사건은 이듬해인 1976년 삼일절에 열린 명동성당 민주구국선언의 도화선이 되기도 했으나 역으로 정권의 민주화 운동에 대한 탄압을 더욱 가중시킨 명분이 되기도 했다. 김 군의 장례는 유신 정권이 무너지고 그가 죽은 뒤 5년이 지난 1980년 4월 서울대 농대 교정에서 치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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