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예와 멍에는 한끗 차'…40년 인사동 지킨 숙명

'개관 40주년' 선화랑 원혜경 대표
'그림장사 안한다' 선대 철학에
숨은작가 발굴하는 소임은 불변
컬렉터는 작가의 절대 후원자
그림 소중히 할 사람으로 엄선
화랑 '유일한 자산'인 작가 모은
'선화랑 개관 40년 전' 14일까지
  • 등록 2017-10-30 오전 12:12:00

    수정 2017-10-30 오후 1:47:25

원혜경 선화랑 대표. “화랑 경영이 싫어 도망만 다녔다”는 그이가 이제 선화랑 40주년 불혹의 시절을 건너 지천명 시대로 들어선다. 뒤로 작가 이정지의 ‘O’ 시리즈 중 한 작품이 보인다. 원 대표가 특히 마음을 기울이는 작가의 작품이다. “평생 한 작업을 해온 작가는 반드시 조명받아야 한다”는 게 그이의 생각이다(사진=신태현 기자).


[이데일리 오현주 선임기자] 불혹. 그 40년을 지내봤다면 안다. 무게감과 비애감의 친밀한 이중주. 어떤 유혹도 없을 거라더니 허울 좋은 말뿐이었다. 진정한 갈등은 마흔부터였다. 버텨온 만큼 버텨야 한다는 책임, 살아온 대로 살아선 안 된다는 압박. 비단 그 나이를 채운 사람뿐이겠나. 세상의 모든 40년은 절실하다, 아니 절박하다. 그래도 인정할 건 하자. 그 하루하루가 어찌 허투루 보낸 세월이겠는가. 역사는 절실하고 절박한 40년이 모여 만든다. 여기 하루같이 서울 종로구 인사동을 꼬박 지켜낸 선화랑이 그랬듯이.

1977년 인사동이 온통 흙길이던 시절. 사거리 언저리에 선화랑이 둥지를 틀었다. 인사동 184번지. 당시까진 고서점·고미술상만 있는 곳으로 알았다. 하나둘씩 친구처럼 따라붙은 화랑이 문을 열면서 인사동은 비로소 한국미술의 메카가 됐다. 2003년 건물을 신축·개관하곤 선아트센터라고 이름 붙였다. 5층으로 규모를 키운 건물은 동네의 이정표가 됐다. 작고·원로·중진·신진·외국작가 등을 엄선해 세상에 알리는 일은 계속됐다. 작정하고 그림장사를 하자고 들었다면 버티지 못했을 시간이다. 약사 출신의 젊은 화상은 그저 “그림이 좋았다.” 김창실(1935∼2011) 선화랑 선대 회장 얘기다.

이숙자의 ‘푸른보리벌-냉이꽃다지’(2008). ‘선화랑 개관 40년’ 전의 1부 전시에 나왔다. 이 화백은 김창실 선화랑 선대회장과 막역한 사이였다고 전해진다(사진=선화랑).


△“도망 다니다” 떠맡은 화랑 경영

원혜경(58) 대표. 40주년의 자리는 그이가 지키고 있다. 김 전 회장이 급작스럽게 타계한 이후 화랑의 경영을 맡아오고 있다. 원 대표는 선대 회장의 며느리다.

“원체 큰 벽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김 전 회장은 굵기가 남달랐다. 30대 중반이던 1977년 손에 끼고 있던 다이아반지를 선뜻 뽑아내 겸재 정선의 그림을 샀다느니, 20대 중반 약사로 일하며 모은 돈으로 도상봉 ‘라일락’(1965)을 구입해 화랑 제1호 소장품으로 삼았다느니 하는 일화는 그저 옛 얘기가 아니었다.

어린 시절 꾸지람 한번 안 듣고 자랐다는 며느리가 그런 큰 인물을 감당하기는 버거웠다. 집안일이야 똑 부러지게 해낼 자신이 있었다지만 어머니의 바람은 다른 차원의 것이었다. 자신의 대를 잇는 화랑 경영. “도망 다니기 시작했다.” 이미 ‘사회복지’로 입지를 이루겠다고 결심했던 터. 하지만 ‘도망생활’은 이내 끝을 봤다.

“2011년부터 경영을 시작했다. 그리 생소하진 않았다. 결혼 전에는 계간지 ‘선미술’에 외국미술을 소개하는 번역을 맡았다. 1983년 결혼한 뒤부턴 전시 오픈 때마다 음식을 직접 준비해 화랑으로 날랐다. 작가들과의 인연도 그때부터였다.”

김명식의 ‘이스트 사이드 17-U02’(2017). ‘선화랑 개관 40년’ 전의 2부 전시에 나선다. 김 화백은 선화랑이 꼽는 대표적 중견작가다(사진=선화랑).


그림으로 장사하지 않는다, 어려운 시절 작가를 위한 공간부터 만들어주자는 선대의 철학은 지금껏 유효하다. 1984년 제정한 ‘선미술상’이 그랬다. 한국화·서양화·조각을 번갈아 시상하던 선미술상은 숨은 젊은 작가들을 뽑아냈고 그들은 ‘한국미술의 허리’가 됐다. 1979년부터 1992년까지 펴낸 계간지 ‘선미술’도 그랬다. 먹고살기에 바빴던 한국사회에 미술문화라는 신세계를 열어줬다.

△인사동 터줏대감의 숙명

40주년을 맞으며 유독 ‘터줏대감’이란 수식이 많이 들렸다. 사실 수많은 인사동 화랑의 성쇠를 고스란히 지켜봤던 터다. ‘진선미 에피소드’도 그중 하나. 선화랑이 개관하던 당시 인사동에는 ‘화랑가의 진선미’가 있었다. 이른바 진·선·미화랑의 ‘트로이카시대’. 오래가진 못했다. 선화랑보다 5년 빨리 개관한 진화랑은 일찌감치 통의동으로 이전했고, 같은 해 개관한 미화랑은 1980년대 중반 강남시대에 편입, 나중에는 갤러리미로 명패까지 바꿔 달았다.

위기감이 왜 없었겠는가. 인사동을 등진 화랑이 하나둘씩 떠나고 그 자리를 기념품판매점이 꿰차기 시작하는데. “1990년대 중반이었나. 어머니와 함께 소격동으로 구기동으로 화랑자리를 보러다닌 적도 있다. 하지만 주저앉았다. 2003년 화랑을 신축·개관하는 것으로 제2의 시대를 연 셈이다.”

김승희의 ‘실내풍경’(1988). 한국을 대표하는 금속조형작가의 이 작품은 ‘선화랑 개관 40년’ 전의 2부 전시에서 볼 수 있다(사진=선화랑).
김정수의 ‘진달래 축복’(2017). 아마포에 세필로 하나하나 심은 꽃잎을 바구니에 수북이 얹어낸 진달래고봉밥이 ‘선화랑 개관 40년’ 전의 2부 전시에 걸린다(사진=선화랑).


이후로 ‘터줏대감’은 숙명이 됐다. 지킬 수도 버릴 수도 없는 딜레마. 셰익스피어가 일찍이 간파하지 않았나. ‘왕관을 쓴 자, 그 무게를 견뎌라’고. “명예면서 멍에다. 반드시 자리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은 없다. 인사동에서 예술혼이 떠났다고들 한다. 현대미술도 설치·미디어로 옮겨가는 중이다. 40년을 지켜낸 보수적인 자세가 필요하겠지만 시대의 변화에 순응해야 한다는 생각도 한다.” 틀이야 어떤들 뭐 그리 대단하겠느냐는 거다. 내면을 곧추세워 흔들리지 않겠다는 의지로 읽혔다.

한 가지는 지켜내겠단다. “‘경영자라면 돈 벌 생각을 해야지’란 얘기를 들으면 화가 난다. ‘잘나가는 작품 좀 가져다가 팔아보지’란 소리에는 내가 뭘 하고 있는 건가 싶다.” 그래서 오기 같은 게 생겼나 보다. “당연히 대접받아야 하는 작가를 발굴해 세상에 알리는 소임은 이루겠다”고 한다. 절대 포기할 수 없는 보루라는 거다. 그 며느리답게 기어이 선대 회장의 면모를 보이고 만다.

정영주의 ‘어스름’(Dusk·2015). ‘선화랑 개관 40년’ 전의 2부 전시에 나선다. 정 화가는 선화랑이 발굴한 대표적인 신진작가다(사진=선화랑).


△“컬렉터를 고민할 때 가장 좋다”

그렇게 원 대표가 마음을 쓰고 애정을 기울인 작가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내달 14일까지 여는 ‘선화랑 개관 40년 전: 40년, 새로운 창을 열다’에서다. 지난 28일까지 1부 전시를 마감하고, 1일부터는 2부 전시를 시작한다. 김병종·김형근·이숙자·하종현·황용엽 등 1세대 선화랑과 함께한 원로·작고작가의 작품을 앞세운 뒤, 김명식·김정수·문형태·송지연·이정지·전명자·정영주 등 2세대 작가들이 그 후면을 받친다. 결국 선화랑의 유일한 자산이 통째 나선 셈이다. 사실 그간 화랑을 유지하기 위해 귀한 소장품을 많이도 내놨다. 다이아반지와 바꾼 겸재 정선의 그림도, 화랑의 출발이 된 도상봉의 ‘라일락’도 지금은 없다. 이젠 작가뿐이다.

원혜경 선화랑 대표는 “‘잘나가는 작품 좀 가져다가 팔아보지’란 소리에는 내가 뭘 하고 있는 건가 싶다”며 “당연히 대접받아야 하는 작가를 발굴해 세상에 알리는 소임은 이루겠다”고 말했다(사진=신태현 기자).


“한 작품에 컬렉터가 몰릴 때가 좋다. 작품가를 올린다는 뜻이겠나. 누가 가장 소중하게 간직할까를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가능하면 첫 컬렉터, 또 작가의 든든한 후원자가 될 컬렉터에게 넘기려고 한다.” 작가와 컬렉터, 화랑의 세 모서리가 비로소 접점을 이루는 순간인 거다.

의심을 접고 미혹을 빼낸다. 그렇게 40년을 보냈다. 이젠 ‘하늘의 명을 알았다’는 지천명을 향한다. 원 대표는 “출발점이 달랐기 때문에 지속해야 하는 이유도 다르다”고 말한다. “다음 세대가 1·2세대의 마음을 지켜주길 바란다. 일본의 가업승계가 그렇듯 자연스럽듯 후대가 그 뜻을 이어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인터뷰 내내 뒷목을 서늘하게 잡아끄는 그것. 명예냐 멍에냐. 그 둘은 멀지 않다. 한끗 차다. 명예를 지키려면 멍에는 짊어져야 하는 거다. 멍에가 싫으면 명예도 버려야 한다. 불혹을 지낸 화랑의 고민이 어찌 그들만의 것이겠는가. 눈을 못 떼게 하는 그림 한 점이 이리도 묵직한데.

문형태의 ‘코끼리’(2017). ‘선화랑 개관 40년’ 전의 2부 전시에 나선다. 문 화가는 선화랑이 발굴한 대표적인 신진작가다(사진=선화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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