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선진화법은 그동안 야당의 든든한 우군이었다. 여야 간 이견이 있는 법을 합의 없이 상정하는 것을 엄격히 제한(국회법 제85조)하거나, 상임위 재적의원 5분의 3의 동의가 있어야 처리가 가능(국회법 제85조의 2)하도록 한 이른바 ‘날치기 방지조항’ 때문이다. 현 의석구도로 야당의 협조 없이는 법안 처리가 사실상 어렵기 때문에 새누리당은 그동안 국회선진화법을 ‘국회마비법’이라고 하면서 헌법소원 심판까지 준비했다.
하지만 국회선진화법은 이제 야당을 정조준하고 있다. 11월 30일까지 예산안과 예산부수법안들이 처리되지 않으면 법에 따라 오는 12월 1일 본회의에 자동부의(국회법 제85조의 3)되고 다음날 통과시킬 수 있다. 정부와 기조를 같이 하는 여당으로서는 기다리기만 하면 원하는 대로 예산안을 처리할 수 있지만, 야당은 시간이 흐르는 자체가 곤혹스럽다. 불과 한 달 전과 비교하면 대조적인 풍경이다.
공수 뒤바뀐 정치적 이해관계
분위기가 반전된 것은 예상을 뒤엎고 총선에서 새누리당이 다수당의 지위를 유지하면서부터다. 새누리당 내에서는 국회법 개정을 재검토해야한다는 목소리가 들끓었다. 반면 여전히 야당신세가 된 민주통합당은 총선 전 약속한 국회법 개정을 매듭지어야한다고 압박했고, 우여곡절 끝에 18대 국회의 마지막 본회의에서 통과됐다.
이렇게 탄생한 국회선진화법이 약 2년간의 시행을 거쳐 서로에게 ‘역설’ 그 자체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동안 국회선진화법을 적극적으로 옹호해온 야당은 ‘국회의장이 각 교섭단체 대표와 합의할 경우에는 예산안을 부의하지 않을 수 있다’는 예외조항을 이용해 시행 첫 해부터 법정처리시한을 어기려 하고 있다. 그동안 국회선진화법을 주적(主敵)처럼 여기던 여당은 “헌법과 국회선진화법의 정신에 따라”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달고 있는 상황이다.
예산안 처리해도 법안처리 또 문제
국회선진화법의 역설은 예산안 처리에서 그치지 않을 전망이다. 국회 예산안이 법에 따라 여당의 방침대로 12월 2일 처리되더라도 아직 심사조차 시작하지 못한 다수의 법안이 남아 있다. 야당은 법안처리에 협조하지 않는 것으로 ‘반격’을 가할 공산이 높다. 26일 야당 지도부가 전 상임위원회 ‘잠정중단’을 중단한 것 역시 여당에 이를 경고한 것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국회가 또다시 장기간 냉각기에 돌입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예고되는 셈이다.
이처럼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감탄고토: 甘呑苦吐) 국회선진화법 논쟁 속에 정작 법안 도입 취지였던 협치와 합의의 정신은 또 다시 길을 잃어가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가상준 단국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국회선진화법이 자신들에게 유리할 때는 이용하고 불리할 때는 이용하지 않는 것은 옳지 못하다”며 “국회선진화법에 의해 여당이 단독으로 예산안을 처리하고, 야당이 이에 대한 보복으로 법안을 처리시키지 않는다면 국민의 따가운 눈총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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