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돌 잔치 들러리? '김환기·유영국·천경자'가 아쉽다

서울시립미술관 30주년 기념전 '디지털 프롬나드'
4700여 소장품서 '자연·산책' 소재로 30점
미디어아트 대표신작 10점 함께 걸었으나
'소장품 재해석한 미디어아트' 기획에 미흡
의도 좋았으나 서로 겉도는 모양새 아쉬움
  • 등록 2018-06-18 오전 12:12:00

    수정 2018-06-18 오전 8:13:42

천경자의 ‘페루 구스코시장’(1979·왼쪽). 1989년 천 화백이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한 93점 중 ‘1979 여행시리즈’로 묶인 11점에 속해 있다. ‘디지털 프롬나드’ 전에 11점 모두가 걸렸다. 오른쪽은 박기진의 미디어아트 ‘공’. 전시의 포문을 연 지름 2.5m 비정형 구 형상이다. 소리·진동·수증기 등을 내는 IT시스템을 내장하고 있다(사진=서울시립미술관).


[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1988년 8월. 서울 종로구 신문로 옛 서울고등학교 자리에 처음 둥지를 틀었다. 이사 간 학교의 교사에 들어섰으니 규모나 모양새가 오죽했을까. 그렇게 14년을 보내고, 2002년 5월 이전·재개관한 것이 지금의 정동길 서소문본관 자리다. 르네상스 양식을 살려 지은 옛 대법원 건물의 전면부만 그대로 남기고 내부는 신축했다. 그후로 다시 16년. 이제 30주년을 맞았다. 명실공히 서울을 대표하는 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이다. 2004년 남서울미술관 분관, 2013년 북서울미술관 분관을 차례로 열어, 마치 서울을 감싸안은 듯, 미술로 영역을 넓힌 것도 적잖은 성과로 꼽힌다.

다소 늦은 감이 없지 않았으나 어쨌든 개관 이후 30년을 충실히 보냈다. 무엇보다 자랑할 만한 것은 틈틈이 모은 소장품. 한국 근현대걸작을 비롯해 회화·판화·사진·조각·설치작품 등 다양한 현대미술 수작 4700여점을 리스트에 올렸다. 설립한 터가 그렇고 위치가 그렇듯 미술관을 둘러싼 역사적 배경은 시민과 예술이 소통하는 테마가 됐다.

짧으면 짧다고 할, 길면 길다고 할 30년. 서울시립미술관이 그 세월을 더듬는 개관 30주년 기념전 ‘디지털 프롬나드’를 열었다. 굵직한 줄기는 역시 소장품이다. 소장품으로 지난 30년을 돌아보겠다는 거다. 우선 4700여점 중 ‘자연과 산책’을 키워드로 30점을 뽑아냈다. 그러곤 한 가지 더. 한국 미디어아트를 대표하는 젊은 작가 10명(팀)이 작업한 10점의 미디어아트 신작을 보탰다.

취지는 이렇다. 엄선한 소장품 30점을 내보이는 건 물론 이를 최신 디지털 테크놀로지 기반의 미디어아트 작품으로 재해석해 새로운 의미를 찾자는 것. 한국미술의 양 갈래를 연결해 두 전시를 동시에 드러내자는 거다. 그런데 말이다. 전시명 ‘디지털 프롬나드’가 걸린다. 여기서 의미하는 의도가 이미 한쪽으로 기운 듯하다는 거다. 우려는 현실이 됐다. 전시장을 빙빙 돌아봐도 근현대걸작을 미디어아트로 재해석했다는 흔적 찾기가 영 마땅치 않은 거다.

이불 ‘무제’(2004)와 조영각의 인터랙티브 미디어설치 ‘깊은 숨’(2018). 앞에 보이는 천장에 걸린 조형물이 소장품 30점 중 하나인 이불의 작품이고, 산업용 로봇팔을 이용한 거대한 모니터의 미디어아트가 조영각의 작품이다. 한 공간에 배치하긴 했지만 두 작품의 연관성은 딱히 없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소장품 30점, 미디어아트로 재해석?

‘프롬나드’는 불어로 ‘산책하다’란 뜻이다. 그만큼 ‘자연과 산책’을 키워드로 소장품 30점을 골라냈다는 맥락과는 멀지 않다. 힘들이지 않고 걸으며 미술관의 역사를 더듬고 작품도 감상하고.

전시작 면면이 그렇다. 김환기의 ‘무제 15-Ⅶ-69 #90’(1969), 유영국의 ‘워크’(1967), 장욱진의 ‘나무’(1989), 천경자의 ‘페루 구스코시장’ 등 여행시리즈(1979), 김창열의 ‘물방울’(1992) 등 한국현대미술사 주요 작가를 선두로, 김종학의 ‘잡초’(1989), 이대원의 ‘농원’(1985), 황창배의 ‘무제’(1993), 이숙자의 ‘푸른 보리밭’(2004) 등 탄탄한 허리작가를 거쳐 김수자의 ‘구걸하는 여인-카이로’(2001), 노상균의 ‘별자리9-쌍둥이자리’(2010), 유근택의 ‘열 개의 창문 혹은 하루’(2011), 이세현의 ‘레드 사이’(2008) 등 후발작가까지 두루 아우르고 있으니. 비록 ‘자연과 산책’에선 벗어난다고 해도 미술관 소장품 제1호라는 박생광의 ‘무속’(1985)이나 임옥상의 ‘귀로’(1984), 이흥덕의 ‘카페’(1987), 이불의 ‘무제’(2004) 등은 그 자체로도 무게감이 적잖다.

김환기의 ‘무제 15-Ⅶ-69 #90’(1969). 서울시립미술관의 소장품 중 한 점이다. 개관 30주년 기념전 ‘디지털 프롬나드’에 소장품 30점 중 한 점으로 선정돼 걸렸다(사진=서울시립미술관).
유영국의 ‘워크’(1967). 서울시립미술관의 소장품 중 한 점이다. 개관 30주년 기념전 ‘디지털 프롬나드’에 소장품 30점 중 한 점으로 선정돼 걸렸다(사진=서울시립미술관).
유근택의 ‘열개의 창문 혹은 하루’(2011). 서울시립미술관의 소장품 중 한 점이다. 개관 30주년 기념전 ‘디지털 프롬나드’에 소장품 30점 중 한 점으로 선정돼 걸렸다(사진=서울시립미술관).


미디어아트 신작도 단순치 않다. 음성인식, 인공지능 딥러닝, 로보네틱스, 위치기반 영상·사운드 인터랙션, 프로젝트 맵핑 등 최신 미디어 테크놀로지를 총동원했다. 지름 2.5m 비정형 구 형상을 세운 박기진의 설치작품 ‘공’(2018)은 전시의 얼굴마담으로 나섰다. 온통 IT시스템을 내장한 공이다. 대형스피커와 우퍼를 품은 사운드시스템, 수증기 분사시스템, 모터·유압기를 이용한 진동시스템까지. 또 최수정의 설치작품 ‘불, 얼음, 그리고 침묵’(2018)은 시각과 청각, 기억과 죽음, 생성과 소멸 등 세상에서 불과 얼음으로 만나는 대립쌍의 변주를 LED필름디스플레이와 패총으로 묶어낸 상징이 돋보인다.

최수정의 설치작품 ‘불, 얼음, 그리고 침묵’(2018). 세상에서 마치 불과 얼음으로 만나는 대립쌍의 변주를 LED필름디스플레이(상단)와 패총(하단)의 상징으로 묶어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이외에도 Sasa[44]의 미디어설치 ‘18개의 작품, 18개의 사람, 18개의 이야기와 58년’(2018), 배윤환의 영상 ‘스튜디오 B로 가는 길’(2018), 조영각의 산업용 로봇팔을 이용한 인터랙티브 미디어설치 ‘깊은 숨’(2018), 역시 이예승의 인터랙티브 미디어설치 ‘중간 공간’(2018) 등은 한국 미디어아트의 ‘바로 지금’을 가늠케 하기에 충분하다.

△굳이 섞으려는 억지스러움이 무리수로

문제는 양쪽의 조화다. 기획의도는 좋았으나 결과물이 못 미쳤다는 얘기다. 오해는 마라. 각각의 작품은 한 점 한 점이 대단히 훌륭하다. 다만 굳이 섞어놓으려는 억지스러움이 무리수였다는 거다. 실행력의 한계라고 할까.

그나마 ‘일상의실천’이 제작한 ‘포스터 제너레이터 1962∼2018’(2018), 권하윤의 ‘그곳에 다다르면’(2018) 정도가 기획내용을 충실히 반영했다고 할까. ‘포스터 제너레이터’는 선정한 소장품을 관람객이 새로운 포스터로 만들어내는 과정을 디자인했고, ‘그곳에 다다르면’은 30점 중 한 점인 석철주의 ‘신몽유도원도’(2009)를 가로 5m 세로 15m짜리 디지털 인터랙티브 설치작품으로 재탄생시킨 것.

권하윤 ‘그곳에 다다르면’(2018). ‘디지털 프롬나드’ 전에 나선 소장품 30점 중 한 점인 석철주의 ‘신몽유도원도’(2009)와 안견의 ‘몽유도원도’(1447)를 모티브로 가로 5m 세로 15m짜리 디지털 인터랙티브 설치작품을 만들어냈다(사진=서울시립미술관).
석철주의 ‘신몽유도원도’(2009). 서울시립미술관 개관 30주년 기념전 ‘디지털 프롬나드’에 소장품 30점 중 한 점으로 선정돼 걸렸다(사진=서울시립미술관).


이들이 아니라면, 거칠게 말해 거대한 미디어 신작 틈에 걸린 근현대걸작이 그저 들러리처럼 보인다고 할까. 결국 소장품 따로 미디어작품 따로, 서로 밀쳐내고 겉도는 모양새란 소리다. 미술관이 내건 전시슬로건인 ‘소장품 30점을 디지털 미디어로 재해석한다’는 일단 빛을 잃게 됐다. 미술관은 이렇게도 밝혔는데, “처음엔 소장품에서 뽑아낸 30점, 나아가 소장품 전체, 더 나아가 미술관에 대한 새로운 해석·참여를 미디어아트 작가들에게 요구했다. 굳이 강제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3순위쯤인 ‘미술관에 대한 재해석’ 작품도 ‘찾아내기’가 쉽지 않으니. 게다가 미디어아트 신작 대부분은 깊이 있는 설명이 필요한 작품들이다. 결국 기획과는 무관하게 그냥 한 점씩 작업하고 발표했다는 게 맞지 않겠느냐는 소리다.

김환기·유영국·장욱진·천경자 등이 정말 디지털 테크놀로지를 만났는가. 대답의 반은 “글쎄요”고, 나머지 반은 관람객 몫이 됐다. 전시개막에 앞서 최효준 서울시립미술관장은 “이번 전시가 시대를 넘나들며 관람객과 소통하는 새로운 의미를 제공하려 했다”고 말했다. 그 소통이란 게 말이다. 부디 관람객이 자신의 모습이 비치는 미디어아트를 신기해하는 체험 정도로 한정하지 않은 것이길 바랄 뿐이다. 전시는 8월 15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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