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소방관이다]"다치면 상여금 삭감"…119는 아파도 참는다

정부 집계, 소방직 공무상 상해 연평균 411건
학계 연구선 1만여명이 치료 필요, 입원건수 4963건
부상 소방직 45% "불이익 등 우려돼 다쳐도 숨겨"
전문가들 "'119' 슈퍼맨 아냐..휴식·치유 필요"
  • 등록 2015-11-09 오전 6:00:00

    수정 2015-11-09 오전 7:08:56

[이데일리 최훈길 기자] . 2000년에 119 구급대원으로 임용된 소방장 정모(여·42)씨는 8년 전에 척추 분리증 진단을 받았다. 수년간 현장에서 들것으로 환자를 나르면서 허리 통증이 생겼다. 정씨는 교육 직무를 맡고 있는 지금도 자비로 치료를 받고 있다. 정씨 주변에는 허리 디스크로 고통받는 동료들이 많다. 하지만, 이들은 공무상 상해 관련 정부 통계에 없는 사람들이다. 누구도 공무상 요양승인 신청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8일 국민안전처·인사혁신처에 따르면, 공무원연금공단 공무원연금급여심의회에 접수된 소방직 공무원의 ‘공무상 요양승인신청’ 건수는 지난 3년간 연평균 411건이다. 2012년에는 407건, 2013년 393건, 2014년 432건에 이어 올해는 294건(7월 기준)이다. 이는 전국 소방직 공무원 4만 406명(올해 1월 기준)중 1% 수준이다. 정부는 소방직 공무원의 공무상 상해(공상) 규모를 집계할 때 이 수치를 활용한다.

그러나 정부가 집계하는 소방직 공무원들의 공상 규모가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는 게 소방직 공무원은 물론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다. 주무부처인 인사처도 이를 부인하지 않는다. 임무 수행 중 부상이나 질병을 얻어도 불이익을 우려해 공상 신청을 하지 않고 자비로 치료하는 대원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정부는 제대로 된 실태조사조차 벌인 적이 없다. 전문가들은 침묵 속에서 병들어가는 ‘119’를 구조하기 위한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고 입을 모은다.

소방관 10명 중 4명은 정신과 치료 필요

연평균 411건이란 수치 뒤에 숨어 있는 소방관들의 열악한 현실은 민간연구를 통해 어느정도 윤곽이 드러나 있다. 학계에서는 치료가 필요한데도 고통을 참고 견디며 현장을 지키는 소방관들을 ‘은폐된 공상자’라고 부른다.

안연순 동국대 직업환경의학과 교수가 소방직 2만561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응답자 중 1만2296명(48%)이 근골격계 증상이 있다고 답했다. 7424명(29.1%)은 피부증상, 4539명(18.4%)은 우울증 증상을 확인했다.

이화여대 뇌인지과학과·뇌융합과학연구원이 지난해 소방직 3만7093명을 상대로 한 설문조사에서는 39%(1만4452명)가 외상후스트레스·알코올·우울·수면장애 중 한 가지 이상의 치료가 필요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응답자 중 지난 1년 간 치료를 받은 소방관은 6.1%에 그쳤다.

연세대 보건대학원 연구진(이상규 교수 등)이 건강보험공단을 통해 입수한 입원자료를 분석한 결과 2008년 한해 동안 소방직 입원건수는 4963건, 총 입원일은 4만4127일에 달했다. 연도별 입원건수는 2000년(1899건)에 비해 8년새 2.6배 증가했다. 이 연구는 개인정보보호법 시행으로 2009년 중단됐다.

안연순 교수는 “소방관들은 아파도 참았다가 견딜 수 없을 정도가 돼야 공상 신청을 하는 경우가 많다”며 “치료가 필요한데도 사회적 관심 밖에서 신음하다 긴박한 재난 현장으로 내몰리는 게 소방관들의 현실”이라고 말했다.

이화여대 산학협력단(뇌인지과학과·뇌융합과학연구원)이 지난해 4월7~18일 전국 소방공무원 3만7093명을 상대로 직무 관련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10명 중 4명 꼴로 외상후스트레스·알코올·우울·수면장애 중 한 가지 이상 치료가 필요한 상태로 나타났다.(단위=명, 출처=국민안전처)
‘다치면 인사상 불이익’…아파도 참는다

소방관들의 건강이 위협받고 있지만 해법 찾기가 쉽지 않다. 인사상 불이익 등을 이유로 공무상 상해를 은폐할 수밖에 없는 현실 때문이다. 최근 서울시 소방재난본부가 관내 소방서를 상대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올해 1~9월까지 업무 중 상해를 입은 73명의 대원 중 33명(45%)이 인사상 불이익 등을 우려해 공상 신청을 하지 않았다.

소속 소방직 공무원들을 관리하는 지방자치단체에서는 현장 안전사고 예방을 위한 조치라는 명목 아래 현장 근무자들이 공무상 상해를 입으면 책임자를 징계조치 하거나 상여금을 삭감하는 등 인사상 불이익을 주는 경우가 적지 않다. 안전처에서 일하는 400여명의 국가직 일부를 제외하면 4만여 소방직 공무원 대부분은 각 지자체 소속이다.

지난달 열린 국정감사에서는 ‘안전사고 발생 시 근무평정·성과상여금 등에서 불이익을 주겠다’라는 인천소방본부 소속 소방서의 공문이 공개돼 물의를 빚었다. 안전처는 최근 전국 지방소방본부에 ‘소방본부별 관서평가 항목에 순직, 부상 시 감점 기준을 전면 폐지하라’는 내용의 공문을 보냈다. 그러나 소방관들은 다치면 불이익을 주는 현실이 쉽게 바뀌지 않을 것이라며 고개를 가로젓는
다.

21년 경력의 한 지자체 소속 소방관은 “지자체 관리자들은 ‘인사상 불이익을 안 주면 현장에서는 공상을 방지하려는 노력을 소홀히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며 “강제력 없는 안전처 지침이 지켜질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부상을 입어 공상 신청을 내기 위해서는 다른 동료들에게 업무를 떠넘겨야 하는 시스템도 부상 소방관들이 ‘아파도 참고 견디는’ 이유 중 하나다.

윤명오 서울시립대 소방방재학과 교수는 “지방소방본부에는 공상처리를 담당하는 직원이 없어 부상자가 스스로 각종 서류를 떼고 신청서를 접수하기 위해 자리를 자주 비울 수밖에 없다”며 “자리를 비우면 동료에게 민폐를 끼칠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 참고 지내는 소방관들이 많다”고 전했다.

정신분석·심상치료 전문가인 임재호 중앙공무원교육원 교수는 “소방 조직에서는 소방관들에게 마초적인 슈퍼맨 의식을 요구하고 있고 사회 분위기도 그런 모습을 기대한다”면서 “‘이제는 휴식하고 치유하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소방조직 윗선부터 깨달아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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