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틀리고 일그러진 몸부림의 초상…"우린 살아있다"

아트사이드갤러리 '오원배 인간-비인간, 그리고 대위법 형식의 조형언어' 전
꼬인 몸짓, 구겨진 표정의 검은 인간들 옆에
기하학적 구조물, 자연물·패턴문양 등 배치
혼돈의 현실 속 실존문제 '대위법'으로 표현
  • 등록 2019-10-21 오전 12:35:00

    수정 2019-10-21 오전 4:44:54

작가 오원배가 서울 종로구 통의동 아트사이드갤러리에 건 자신의 작품 ‘무제’(2019) 앞에서 ‘검은 인간’을 만들어낸 기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작품에는 잔뜩 뒤틀린 몸짓으로 버둥대는 두 인물과 선풍기, 수도꼭지와 트럼펫, 방독면과 소화기, 의자와 고깔 등 연관성 없는 사물들이 널브러져 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평범치 않은 공간이다. 돌지 않는 선풍기를 중심에 세우고 전혀 어울리지 않은 사물이 널브러져 있다. 수도꼭지와 트럼펫, 방독면과 소화기, 의자와 고깔. 그 틈에 잔뜩 뒤틀린 몸짓으로 버둥대는 두 인간이 보인다. 팔과 다리, 가슴과 배, 신체 부위가 따로 노는 듯한 움직임을 따라 검은 근육이 생겨난다. 또 하나, 눈을 돌릴 수 없게 마음을 빼앗는 저들의 표정 말이다. 고통과 환희, 비애와 노여움, 공허와 고독 등이 온통 뒤섞인 일그러진 얼굴이다. 한마디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허공에 겹겹이 꽂힌다. 가로 388㎝ 세로 259㎝의 ‘무제’(2019). 이 거대한 그림은 도대체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건가.

서울 종로구 통의동 아트사이드갤러리에 검은 초상이 들어찼다. 작가 오원배(66·동국대 예술대 명예교수)의 붓끝이 창조한 세상이다. 실을 매단 듯 당기고 늦춘, 뻗치고 꼬인 몸부림이 가득하다. 그렇다고 이 세상을 그들만의 것이라고 할 수도 없다. 인물과 섞인 또 다른 세계가 보이니까. 기하학적 구조물, 이름모를 자연물, 패턴화한 문양 등이 나란히 들어서 있으니 말이다. 2017년부터 최근까지 작업한 회화 39점으로 구성한 이 혼란한 판에 붙인 타이틀은 ‘인간-비인간, 그리고 대위법 형식의 조형언어’다.

오원배의 ‘무제’(2019) 두 점. 한쪽엔 리듬감 있는 인물을, 다른 한쪽엔 패턴화한 문양을 나란히 배치해 복합·중층적인 시대상황을 표현하고자 했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가 의도한 ‘대위법 형식의 조형언어’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복합·중층적 현실 설명하는 방식 ‘대위법’

‘대위법’이라. 미술보단 음악에서 쓰는 용어가 아닌가. 성격이 다른 두 개 이상의 멜로디를 결합하는 작곡기법. 여전히 생소하다면, 하나의 멜로디에 다른 하나의 멜로디를 반주처럼 받치는 형식을 떠올리면 이해가 좀 쉽다.

그런데 왜 하필 대위법인가. 개막에 앞서 전시장에서 만난 오 작가는 “변주와는 다른 의미”라며 “독립된 주체를 묶었기 때문에 대위법을 떠올렸다”고 답한다. “인물의 제스처가 있다 보니 하나하나의 리듬이나 율동이 느껴져” 음악용어인 대위법이 자연스러웠다는 얘기다.

풀어내면 이렇다. 작가가 음표 대신 형상으로 묘사한 세상은 말이다. 각각의 독립적인 구성체가 어울려 얼개를 짜고 구조를 이룬다는 거다. 그래서 검은 인간들 옆에 수도꼭지와 방독면이 놓인 게, 가시 돋힌 선인장이 서 있는 게(‘무제’ 2018), 유·무형의 도형이 들어선 게(‘무제’ 2019) 전혀 어색하지 않은 거다.

그렇다면 왜 굳이? “두세 점의 작품을 병치했을 때 거기서 나오는 이야기가 있다고 생각했다. 오늘날의 현실을 어찌 단선적으로 말할 수 있겠나. 대단히 미묘하고 복합적이고 중층적이지 않나.” 이런 뜻일 거다. 세상은 복잡한데다가 불확실한, 혼돈의 연속이니까. 바로 그 장면이 우리가 늘 보는 현실이고, 또 현대사회라 부르는 것이고. 여기에는 좋다 나쁘다, 옳다 그르다 등의 강압적 잣대를 들이댈 수 없으며, 결국 내 안에 든 내면세계를 끄집어내는 것이 답일 수밖에 없다는.

오원배의 ‘무제’(2019) 다섯 점. 알 수 없는 몸짓으로 존재감을 표현하는 검은 인간들 사이로 자연물과 기하학적 도형을 그린 작품을 배치했다. 작가가 평소 쓰는 판화잉크와 안료에 더해 목탄으로 번짐 효과를 높였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오 작가의 검은 인간을 이해하려면 시절을 거스를 필요가 있다. 화업을 시작한 1970년대부터다. 시대와 사회가 빚어내는 현실세상, 그 틈에 끼어사는 인간세상, 그 둘의 조화 혹은 부조화가 작가의 오랜 테마였던 거다. 한마디로 ‘현대인이 겪는 시대적 압박과 실존적 문제’라고 할까. 그러니 고독·불안·소외·허무 등을 끌어안은 인물이 부각될 수밖에. 세월에 따라 점점 단순화하고 점점 시커멓게 변한 그들. 그렇다고 늘 괴로워하는 것만도 아니란다. “불안에 저항하는 몸짓이라기보다 희로애락을 다 담아냈다고 보는 게 맞다”고 했다.

다만 주제는 시대상을 반영했다. “1970∼80년대는 체제의 고민을 담았고, 1990년대에는 개발과 환경, 이후엔 개인 간 충돌문제도 다뤄 봤다.” 그러던 것이 2017년엔 인공지능이 인간에게 가하는 위기감에까지 도달했다. 그해 개인전에서 오 작가는 기계화한 인공지능과 싸우는 인간을 다룬 32m 대작을 꺼내놓기도 했다.

오원배의 ‘무제’(2019) 두 점. 작품의 배치가 유독 중요한 이번 전시에서 ‘검은 인간’을 섞지 않고 따로 건 몇 안 되는 작품이다. 가시 돋힌 선인장, 붉게 피운 꽃 등은 작가가 자연물 중에서도 자주 내놓는 소재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판화처럼 보이는 기법…묵직한 깊이감 높여

모든 그림에 작가는 한결같이 ‘무제’(Untitled)란 작품명을 단다. 판단은 보는 이에게 맡겨두겠다는 거다. 한 가지만 고집했다. ‘드로잉’이다. 규모가 크든 작든, 구상이든 비구상이든 모든 근원을 ‘드로잉’에 두겠다는 뜻이다. “표현은 인간이 가진 동세(운동감)를 강화하는 쪽으로 변화해 왔다. 다만 일상에서 순간순간 와닿는 것을 기록하는 일관된 수단이 있는데, 드로잉이다.” 그저 회화의 밑그림처럼 여겨왔던 ‘드로잉’을 승화시켜 지난 시간의 경계까지 벗겨내겠다는 의지가 읽힌다. “출발점은 하나니까. 작품이 나오는 원천이 그곳이니까.”

작가 오원배가 자신의 작품 ‘무제’(2019) 앞에 섰다. 가로 388㎝ 세로 259㎝ 규모의 작품은 작가 자신이 바라본 혼돈의 현대사회, 시대가 만든 복잡한 현실 그대로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무엇보다 눈여겨볼 것은 붓터치다. 마치 판화처럼 보이는 기법은 작가가 의도한 방식이다. 검은 인간은 유성 판화잉크로, 색색 사물은 안료로 작업한다. 캔버스작업이 없진 않지만 대부분 종이에 그리는데, 묵직한 깊이감을 품은 거친 목판화처럼 보이는 건 그 때문이다. 덕분에 특히 인물은, 외형은 물론 감정까지 고스란히 살려낸 모습을 얻었다. 이런 특별한 인물은 어찌 만들어내나. “전속모델이 있다. 사진을 몇천 장 찍어 그중 40∼50컷 정도 골라내 작품에 반영한다.”

대학에서 퇴직 후 경기 고양시 삼송동에 마련한 작업실이 요즘 오 작가의 일터다. 천고 7m의 새 작업실 덕에 대작을 향한 욕구가 샘솟는 듯했다. “32년간 선생으로 있다가 좋은 작업실로 옮기고 보니 그간 해오지 않던 형식을 동원한 작품을 해보고 싶어졌다”고 했다.

그것이 무엇이든 단순한 조형실험 이상일 거다. 의식·무의식을 총출동해 바라보는 ‘세상풍경’이란 게 적절할 거고. 그 안에서 누군가의 장구한 서사는 다시 이어질 테지. 검은 인간이 더 늘어나든, 꽃을 더 피우든, 추상성 짙은 도형이 더 들어서든. 전시는 11월 17일까지.

오원배의 ‘무제’(2019). 가로세로 230×97cm로, 전시작 중 두 번째로 큰 작품이다. 기하학적 구조물과 두 인물을 한 캔버스에 넣었다. 아트사이드갤러리 입구에 걸린 덕에 유리창에 비친 조명까지 입어 분위기가 독특하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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