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김용운 기자] 1991년 3월 천경자 화백은 친하게 지내던 박현령 시인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현대그룹 사옥에서 선생님 작품인 ‘미인도’를 봤습니다. 그런데 선생님 작품 같지 않은 요상한 그림이네요.” 희대의 스캔들로 꼽히는 ‘미인도’ 위작사건의 시작이다.
천경자(1924~2016) 화백은 한국미술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작가다. 전남 고흥에서 태어나 일제강점기 동경여자미술전문대에서 그림을 배운 그녀는 1952년 부산의 국제구락부서 연 개인전에서 뱀을 그린 ‘생태’를 선봬 한국화단에 큰 충격을 던진다. 20대 여성화가도 드물었던 데다가 뱀이란 소재가 워낙 파격적이었기 때문이다. 세상의 편견을 뚫고 30세에 홍익대 동양학과 교수가 된 천 화백은 이후 한국화단을 대표하는 작가로 예술혼을 불태웠다. 1991년 ‘미인도’ 위작사건이 벌어지기 전까지는.
생전의 마지막 개인전이던 1995년 호암미술관의 ‘천경자 전’을 담당했던 저자는 그녀의 일생을 각종 자료에 근거해 입체적으로 복원한다. 천 화백과의 인간적인 친분 덕에 그녀를 둘러싼 여러 일화와 뒷이야기 등을 소상하게 펼쳐놓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 천 화백의 작품에 대해 “샤갈이나 고갱, 루소, 프라다 칼로 등 서양작가의 화풍을 적당히 섭렵한 작가가 아니다”라며 “한과 신명의 미학을 바탕으로 고통스러운 실존과 환상적인 낭만을 공존시키고 생명 내부의 갈등을 해소한 실존적 낭만주의자”라고 높이 평가한다. 곡절 많은 삶을 예술로 승화시켰기 때문이다.
나아가 천 화백 타계 이후 다시 불붙은 ‘미인도’ 위작논란의 쟁점을 세세하게 짚어준다. 1991년 박 시인의 연락을 받은 천 화백은 ‘미인도’를 소장한 국립현대미술관에게 요청해 그림을 본 뒤 자신이 그린 작품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당시 ‘미인도’를 순회전시하던 국립현대미술관은 곤란한 상황에 빠졌다. 만약 위작이라면 국립기관의 신뢰 자체가 흔들릴 수 있었기 때문. 저자는 이 과정을 예술학을 공부한 학자적 양심으로 들여다봤다. 그러곤 ‘미인도’ 위작논란이 진위 판명의 기술적 문제가 아니라 관료제의 폐단이 얽혀 있는 구조적 문제였다는 데까지 접근한다.
단순히 한 화가에 대한 평전으로서의 가치뿐만 아니라 최근 미술계를 둘러싼 위작파문의 맥락을 짚는데도 도움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