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풀고 나중에 묶어라"…규제개혁, 先허용·後규제로

규제 혁파 소극적인 공무원, 대통령이 나서야 움직여
법 위에 선 고시(告示)제도부터 바꿔야
“先허용·後규제…책임지는 정부 필요”
美FDA도 '먼저 풀고 나중에 묶는' 사전허용 프로그램 시도
  • 등록 2019-01-07 오전 6:00:00

    수정 2019-01-07 오후 12:43:22

[이데일리 방성훈 기자] 과거 우리나라의 규제개혁이 전 세계에 화제가 됐던 때가 있다. IMF 외환위기 직후인 김대중 전(前) 대통령 시절 때다. 김전 대통령은 1998년 규제개혁위원회를 신설해 1만185개였던 규제를 2002년엔 7724개까지 줄였다. 대통령이 규제를 얼마나 없앴는지 직접 챙기자 공무원들은 앞다퉈 규제 폐지에 나섰다. 기업가들은 김 전 대통령 때를 사업하기 좋은 시절로 기억한다. 후임 대통령들은 규제개혁에 김 전 대통령 만큼 열성적이지 않았다. 규제가 다시 늘어나기 시작해 2013년 1만5269개로 고점을 찍은 뒤 현재까지 비슷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법 위에 선 고시(告示)제도 바꿔야

전문가들은 우리나라에서 규제개혁이 어려운 이유로 ‘권한은 강하지만, 책임은 지지 않으려는 공무원’ 때문이라고 입을 모았다. 정부가 법률, 고시, 행정지도 등 다양한 방식으로 규제를 양산해 기업들의 발목만 잡고 있다는 것이다. 또 합리적 논의가 어려운 정치사회적 환경도 문제라고 봤다.

4일 서울 도곡동 KCERN센터에서 열린 규제개혁토론회 참석자들은 “현재 한국의 규제 환경은 세계 최악”이라며 규제개혁을 김대중 정부 때처럼 대통령이 직접 나서 챙겨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곽노성 한양대 과학기술정책학 특임 교수는 현행 규제 시스템의 가장 큰 문제점 중 하나로 고시(告示)제도를 꼽았다. 고시는 행정기관이 내부적으로 결정한 사항을 국민들에게 알리는 제도다.

그는 “고시는 행정부 내부만 제한할 수 있도록 규정돼 있다. 고시를 근거로 국민을 구속할 수 없다는 대법원 판례도 있다. 그런데 실질적으로는 법보다 더 강한 효력을 가지고 있고 공무원도 업무 편의를 위해 남발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민화 창조경제연구회(KCERN) 이사장도 “국민들을 옥죄는 주요 규제들이 전부 고시에서 나오고 있다. 법치국가가 아니라 고시국가”라고 꼬집었다. 그는 “고시가 행정부처 내부에 국한된다는 원칙만 지켜져도 많은 규제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삼성바이오 사태 규제권한 남용 대표사례”

곽 교수는 또 오래된 관치 관행도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는 “어떤 문제가 발생하면 적용할 수 있는 규제가 이미 많이 존재한다. 공무원은 편의대로 적용하거나 애매하면 아예 새로운 규제를 만든다. 기존 규제들은 왜 만들어졌는지, 누가 만들었는지 알 수도 없고, 적용때는 권한을 가지고 있는 담당자의 주관적 해석이나 판단에 의한 경우가 많다. 삼성바이오 분식회계 사건이 대표적”이라고 설명했다.

구태언 태크앤로 대표 변호사는 진흥법을 예로 들었다. 각종 진흥법이 500여개나 되지만 실제로 적용대상 기업이 더이상 남아있지 않은 경우도 있다. 게다가 진흥법이 진흥이 아닌 규제수단으로 전락한 경우도 많다는 게 구 변호사의 설명이다.

그는 “진흥법은 조직, 예산, 인력 확보 등을 위한 각 부처 간 생존경쟁 유지 수단으로 전락했다”고 했다.

구 변호사는 또 “정부 입법을 보면 형벌 위주다. 뒤처리, 즉 책임은 사법부와 지방자치단체에 떠맡기는 식이다. 또 법규 위배 여부가 모호해 유권해석을 요청하면 대부분 부정적 답변이 돌아오는데 적극 대응할 경우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이 많아지고 책임도 커지기 때문”이라고 비판했다.

김태윤 한양대 행정학 교수는 규제개혁이 어려운 이유가 우리 사회가 갈등적인 정책 사안을 분석할 능력이 부족한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편의점 상비약 판매 당시 이를 반대했던 대한약사협회가 오남용률이라는 개념을 가져다 새로운 규제를 만든 사례를 들었다.

김 교수는 “대한약사협회가 약국 매출이 줄어서 반대한다고 하지 않고 의약품 오남용이 우려를 제기하면서 반대했다. 그때 난생 처음 보는 오남용률이라는 개념이 등장했다. 협회가 자체 통계로 만든 수치다. 협회가 정보를 독점한 탓에 객관적인 판단이 불가능했다. 결국 안전 관련 규제만 양산됐다”고 전했다.

“先허용·後규제…책임지는 정부 필요”

전문가들은 ‘선허용·후규제’를 강조했다. 우선 자유롭게 풀어준 뒤 나중에 문제가 발생하면 제한적으로 허용해주는 방식이다.

김 교수는 “미국에서 규제가 가장 강하다는 식품의약국(FDA)이 ‘사전허용(pre-certification )’ 프로그램이라는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다. 믿을 만한 기업을 선정하고 해당 기업과 함께 서비스 및 제품의 위험성을 분석하는 연구 프로그램이다. 위험성을 9단계 또는 18단계로 분류해 확인이 가능토록 한 뒤, 특정 위험이 있는 서비스·제품에 대해 우선적으로 시행·출시가 가능토록 하는 제도다. 모니터링은 사후에 이뤄진다”고 전했다.

김 교수는 “핵심은 기업을 파트너로 생각하고, 신뢰할 수 있으면 믿어주고, 서비스나 제품을 출시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정부는 가능하면 완화·방임하고, 대신 센서를 많이 설치해 부작용에 대해선 본인들이 모니터링해야 한다. 문제가 생길까봐 미리 다 때려잡아선 안된다. 모든 걸 할 수 있도록 해놓고 문제가 생기면 대응해 나가는 방식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곽 교수는 규제를 적용하는 시점을 판단하는 것도 중요한 문제라고 조언했다.

그는 “정부가 지금 개입해 규제할 것인가, 아니면 좀 더 발전하게 두고 더 큰 문제가 있는지 확인해볼 것인지 판단 해야한다”면서 “규제를 하고 싶어도 참으면서 기업이 다양한 시도를 해볼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구 변호사는 국민이나 산업이 아닌 정부를 규제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각 정부 부처 내에 규제를 무작위로 양산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부서를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 “입법 투명성을 높여 정부가 어떤 법을 어떤 이유로 어떻게 논의했는지 공공데이터로 공개토록 해야 한다. 법률 준비를 위해 담당 실무자들이 얼마나 노력했는지 확인할 수 있고, 추후 재개정 또는 폐지 시에 검토 자료로 활용할 수 있다. 공무원들이 함부로 법을 만들지 못하도록 할 수 있다”고 했다.

“대통령이 직접 챙겨야 공무원들 움직여”

규제개혁과 관련해 아무리 많은 논의가 이뤄지더라도 실제 개혁이 이뤄지려면 대통령의 의지가 가장 중요하다는데 전문가들은 동의했다.

이 이사장은 “김 전 대통령 시절 규제를 완화할 수 있었던 다른 이유는 없었다. 온전히 대통령 리더십이었다”면서 규제개혁을 위해 대통령의 의지가 얼마나 중요한지 역설했다.

곽 교수도 “규제를 개혁·개선하려고 하면 항상 안전 문제와 맞물려 국민들의 거부감이라는 장벽을 맞닥뜨린다. 인터넷 은행 사례에서 확인됐듯 이를 극복할 수 있는 건 대통령 리더십이다”라고 거들었다.

대통령의 의지는 예산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고 이 이사장은 설명했다.

그는 “한국 기술개발 투자금액이 총 60조원을 넘는다. 국내총생산(GDP)의 4.3% 수준이다. 이 중 정부 투자금액은 20조원 가량이다. 반면 혁신성장에 가장 중요한 규제개혁에 투자되는 돈은 100억원이 안된다. 개혁은 절대로 공짜로 이뤄지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아직도 정부가 기술개발을 혁신성장의 핵심요소로 잘못 알고 있다는 지적이다.

김 교수는 규제개혁위원회 위상을 공정거래위원회 수준으로 강화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는 “정부 안에서 규제개혁을 업으로 하는 기구가 있다. 바로 규제개혁위원회다. 그런데 예산은 10억원에 불과하다. 공정위 수준으로 키워 규제 당국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규제개혁도 탄력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왼쪽부터)김태윤 한양대 행정학 교수, 곽노성 한양대 과학기술정책학 교수, 이민화 창조경제연구회(KCERN) 이사장 겸 카이스트 교수, 구태언 태크앤로 대표 변호사가 4일 서울 강남구 카이스트 도곡캠퍼스에서 열린 규제개혁토론회에 참석해 얘기를 나누고 있다. (사진=이데일리 신태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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