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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향후 450조원 투자보따리를 풀어놓고 던진 한마디다. 이처럼 이 부회장은 산적해 있는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해 글로벌 유수 반도체 기업 경영진들을 잇달아 만나며 경영 보폭을 넓히고 있다. 이 부회장이 직접 나선 만큼 삼성전자(005930)가 목표로 하는 ‘시스템반도체 비전 2030’ 달성의 관건인 기술 초격차와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강화에 성과를 낼 수 있을지에도 관심이 쏠린다.
재판 일정 뒤로 하고 해외 출장…중동 이후 반년만
이 부회장은 오는 7일부터 18일까지 네덜란드 등 유럽 출장길에 오른다. 반도체 미세공정에 ASML의 극자외선(EUV) 노광장비 공급 협상에 나서는 등 유럽 주요 기업들과 비즈니스 협력에 나설 것으로 예상된다. 최근 인수합병(M&A) 가능성이 제기된 반도체 설계기업인 ARM의 본사도 영국에 있다.
이번 출장은 이 부회장이 반년 만에 글로벌 현장 경영을 재개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는 평가다. 이 부회장은 지난해 말 나흘간의 중동 출장을 마친 이후 재판 일정 등에 발목이 잡혀 글로벌 행보를 이어가지 못하고 있었다. 이 부회장은 앞서 삼성물산·제일모직 불법합병 혐의 공판 출석이 어렵다며 재판부에 밝혔고, 이같은 불출석 의사가 받아들여지자 글로벌 경영에 시동이 걸린 것으로 풀이된다.
이 부회장은 출장기간 중 네덜란드의 반도체장비기업인 ASML을 우선 찾을 예정이다. ASML은 EUV 노광장비를 독점 생산하는 기업으로, 네덜란드에 본사가 있다. ASML은 반도체 업체에게는 ‘슈퍼 을(乙)’로 불린다. EUV 장비는 1대당 2000억원에 달하는 고가인데다 생산 가능 수량이 1년에 약 40대뿐이라 확보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반도체 초미세공정에 필수적인 장비인 만큼 삼성전자와 경쟁사인 대만 TSMC 입장에선 얼마나 많이, 누가 더 빨리 가져가는지가 관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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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이 부회장은 2020년 10월에도 반도체 장비 확보를 위해 ASML 본사를 방문한 바 있다. 이번 출장에서도 피터 베닝크 ASML 최고경영자(CEO) 등 임원진을 직접 만나 장비 공급 협의를 진행할 것으로 보인다.
삼성전자와 ASML의 관계는 돈독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피터 베닝크 CEO는 지난해 11월 방한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000660) 등 주요 거래처와 만남을 가진 데 이어 지난 4월에도 한국을 찾았다. 이때엔 삼성전자 반도체공장이 위치하기도 한 화성시를 찾아 ‘ASML 화성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과 관련한 협력 방안을 논의했다. ASML은 2025년까지 2400억원을 투자해 화성 동탄2신도시 부지에 EUV 및 심자외선(DUV) 노광장비 트레이닝·재제조센터 등이 들어서는 첨단 클러스터를 구축한다.
이 부회장은 지난달 펫 갤싱어 인텔 CEO를 만나 파운드리 협력 방안 등을 논의했다. 삼성전자와 인텔은 글로벌 반도체 시장에서 1,2위를 다투는 라이벌 관계지만 인텔이 파운드리 시장 진출을 선언하며 삼성과의 협업이 불가피하다. 아직까지 팹이 없어 생산을 하지 못하는 인텔 입장에서 삼성전자 파운드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TSMC를 따라잡고 시스템반도체 1위 달성을 목표로 하는 삼성전자에게도 도움이 될 수 있는 상황이다.
한편 이번 출장에선 이 부회장과 마크 루터 네덜란드 총리와의 회동도 예상된다. 앞서 윤석열 대통령은 마크 루터 네덜란드 총리와 통화하며 양국간 반도체 협력을 더욱 확대할 것을 약속했다. 업계에선 삼성전자가 네덜란드와의 경제협력의 주도적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번 유럽 방문에서 그간 꾸준히 제기됐던 대형 인수·합병이 나올지도 관심사다. 외신 보도에 따르면 삼성전자가 ARM 인수에 나설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인텔과 SK하이닉스도 앞서 ARM 인수 관련 희망 의사를 밝혔다. 미국 엔비디아가 앞서 반독점 규제로 ARM을 인수하지 못한 선례가 있는 만큼 한국과 미국기업들이 컨소시엄을 구성할 가능성도 제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