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비·후궁 '그녀들만의 질서'를 엿보다

'500년 역사 조선의 왕비·후궁을 만나다' 특별강연
국립고궁박물관 '조선의 왕비와 후궁' 전 연계
궁중암투 등 부정적 이미지 벗겨내고
"왕비·후궁' 지위 따라 다른 역할" 재조명
전시는 8월 30일까지…인장·장식품 등 유물 300점
  • 등록 2015-07-30 오전 6:19:00

    수정 2015-07-30 오전 6:19:00

영친왕비 홍원삼(왼쪽)과 의친왕비 녹원삼. 홍원삼을 입는 왕비는 주요 의례를 주관했다(사진=문화재청).


[이데일리 김성곤 기자] 평일 한낮 무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많은 사람들이 몰려든 곳은 서울 종로구 세종로 국립고궁박물관. ‘500년 역사를 지켜온 조선의 왕비와 후궁’이란 주제의 특별강연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60대 노신사부터 방학을 맞아 부모와 함께 방문한 초중생까지 어느새 200여석이 꽉 들어찼다. 지난 23일 오후에 열린 강연은 박물관이 오는 8월 30일까지 펼친 ‘오백년 역사를 지켜온 조선의 왕비와 후궁’ 특별전과 연계해 만든 자리다. 궁중암투 등 부정적 이미지로만 그려지며 제대로 주목받지 못한 조선의 왕비와 후궁을 새롭게 재조명했다.

◇삼복 더위에도 노신사부터 초등생까지 몰려

‘조선시대 왕비와 후궁의 위상과 변천’이란 주제로 이날 강연에 나선 양웅열 고궁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조선 왕실이 500년 역사를 이어오는데 한 축을 담당했던 왕비와 후궁의 역할과 위상을 새롭게 조명해야 한다”고 말문을 열었다. 이어 “조선 개국 후 성리학적 유교질서로 국왕은 혼인한 왕비가 죽었을 경우에만 부인을 맞을 수 있는 일부일처제가 성립됐다”며 “덕분에 왕비의 지위는 고려보다 높아지고 후궁과도 큰 차이가 생겼다”고 설명했다.

조선의 왕비와 세자빈, 후궁은 엄격한 위계질서 아래 있었다. 각각의 지위에 따라 역할도 다르고 거주하는 곳과 먹는 것에도 차등이 있었다. 왕비는 국왕과 마찬가지로 품계가 없었다. 반면 후궁은 1품 빈·귀인, 2품 소의·숙의, 3품 소용·숙용, 4품 소원·숙원으로 지위를 구분했다. 국왕 사후에도 대비는 궁궐에서 생활했지만 선조 이래 후궁은 3년상을 치른 뒤 궁궐 밖으로 나와 사제에서 생활했다.

왕비는 세 차례에 걸친 엄격한 심사과정인 이른바 삼간택(三揀擇)을 통해 최종 결정된 뒤 육례(六禮)라는 복잡한 절차로 이뤄진 가례를 올린 뒤 국모의 지위에 오를 수 있었다. 반면 후궁은 사대부 가문 출신으로 간택을 거쳐 국왕과 가례를 올리거나 궁녀 중 국왕의 눈에 띄어 발탁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후 사림이 주도하는 조선 후기가 되면 사대부의 딸인 후궁에게도 삼간택을 적용하고 별궁을 내어주는 등 대우가 높아졌다.

내명부의 수장인 왕비는 위로는 대비와 같은 왕실어른을 섬기고 아래로는 내외명부를 지도, 궁중의 권위와 질서를 확립하는 것은 물론 직접 뽕을 따서 누에를 치는 ‘친잠례’와 같은 주요 의례를 주관했다. 후궁은 왕비를 도와 의례에 참석하고 제사준비와 손님접대 등을 담당했다. 물론 왕비와 후궁에게 공통되는 가장 중요한 덕목은 아들을 낳아 왕위를 잇게 해 왕실의 안정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경종비 선의왕후 왕비 책봉 시 받은 금보(사진=문화재청).


◇‘수렴청정’… 독단 아닌 왕과 함께하는 정치

임혜련 숙명여대 역사문화학과 강사는 ‘수렴청정의 왕비들’이란 주제로 청중을 사로잡았다. 조선 왕비들이 한 일 중 눈여겨볼 대목이 바로 수렴청정이란 것.

새로운 왕이 즉위하면 왕비는 국모의 자리에서 물러나 왕실 최고의 어른이 됐는데 때로 미성년 왕이 즉위하면 수렴청정에 나서기도 했다. 수렴청정은 어린 허수아비 왕을 대신해 전권을 휘두른다는 오해 때문에 부정적으로 인식하기도 했지만 정치를 독단하는 게 아니라 왕과 함께 조정에 나아가서 함께 정치를 한다는 의미였다. 임 강사는 “수렴청정이 부정적이었던 것은 섭정과 구분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며 “왕비 성향과 정치 상황에 따라 차이가 있었지만 조선왕조가 지속할 수 있는 차선으로 왕조체제를 유지한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조선시대에는 성종부터 고종까지 모두 7차례의 수렴청정이 있었다. 최초는 성종 때 세조비였던 정희왕후였다. 왕의 모후가 아닌 왕실의 최고 어른이 수렴청정하는 선례가 이때 만들어졌다. 명종 때 중종비였던 문정왕후는 ‘철의 여인’으로 불릴 정도의 권력자였다. 을사사화를 주도해 사림을 탄압한 것은 물론 수렴청정이 마무리되는 철렴 이후에도 계속해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정조 사후 세도정치 시대였던 19세기에는 연이어 어린 왕이 즉위하면서 순조·헌종·철종·고종 4대에 걸쳐 수렴청정이 행해졌다. 특이한 점은 순조비 순원왕후는 조선 역사상 유일하게 두 차례의 수렴청정(헌종·철종)을 했다는 것. 헌종에 이어 왕위에 오른 철종이 즉위 당시 19세였지만 강화도령을 지내면서 군왕의 수업을 받지 못했기 때문. 2대의 걸친 순원왕후의 수렴청정은 안동김씨의 세도정치를 확대하는 기반이 되면서 적잖은 폐단을 남겼다. 아울러 익종비로 고종 때 수렴청정에 나섰던 신정왕후는 흥선대원군과 협력해 기존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폐해를 시정하고 왕권 강화와 왕실의 위상 강화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신정왕후(헌종의 어머니) 탄신 60주년 기념 잔치를 그린 ‘무진진찬도병’(1868). 미국 LA카운티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다(사진=국립고궁박물관).


◇왕비, 예비신부 교육받는 과정도 소개

박물관 2층과 지하 1층 기획전시실에선 ‘500년 역사를 지켜온 조선의 왕비와 후궁’ 특별전을 오는 8월 30일까지 연다. 왕비를 정점으로 하는 궁중 여성의 공식적인 위계인 내명부를 시작으로, 왕실 밖 사대부 여성이 간택과정을 거쳐 왕비로 책봉되거나 후궁으로 봉작된 후, 별궁에서 예비 신부교육을 받고 왕과 가례를 올리는 과정 등을 소개한다. 왕실의 존엄성과 위계를 보여주는 황원삼, 홍원삼, 녹원삼 등 왕실여성의 복식과 황후와 왕비, 세손빈이 사용했던 인장 등 왕비와 후궁과 관련한 유물 총 300여점을 선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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