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워-스트래티지(WarStrategy)
전쟁은 무기의 질, 병력의 수보다 어떻게 준비하고 어떤 전략과 작전을 바탕으로 전투를 수행하느냐에 따라 승패가 결정된다. 한국전쟁을 시작으로 페르시아 전쟁 등 인류사의 향배를 결정지은 수많은 전쟁과 이에 얽힌 전략적 사유를 통해 개인과 국가의 행위를 이해하는 폭을 넓힌다.
☆ 최영진 중앙대 정치국제학과 교수
중앙대에서 정치국제학과 교수로 재직. 한국정치외교사학회 회장, 한국정치학회 부회장 역임. 육군 및 해군 발전자문위원. ‘전쟁과 미술’ 발간. ‘현대군사명저를 찾아’, ‘군사고전 다시읽기’, ‘역사속의 군사전략’ 등 기고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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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진 교수는 위대한 생각 ‘워-스트래티지’ 두 번째 강연에서 ‘페르시아 전쟁’을 통해 민주주의와 공동체 정신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페르시아 전쟁은 기원전(BC) 490년부터 BC 450년까지 40년에 걸쳐 펼쳐진 그리스와 페르시아의 전쟁이다. 이 전쟁은 역사상 최초의 동·서양 간 전쟁으로 기록돼 있으며, 2007년 개봉한 영화 ‘300’의 실제 배경이다.
식민지 반란에서 시작된 전쟁
BC 499년 페르시아의 식민지였던 ‘이오니아’에서 반란이 일어난다. 현재의 터키 지역인 이오니아에는 그리스 도시 국가들이 정착해 있었지만 페르시아의 키루수 2세에 의해 복속됐다. 페르시아의 지배에 불만을 품던 그리스 도시 국가들이 밀레투스를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1세가 반란을 무자비하게 진압하자, 이들은 그리스 본토 도시국가들에 도움을 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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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 491년 다시 원정을 준비한 다리우스 1세는 스파르타와 아테네에 사절을 보내 복종의 의미로 ‘흙과 물’을 보낼 것을 요구한다. 스파르타와 아테네는 사절을 처형하는 것으로 거절 의사를 밝힌다. 영화 ‘300’에서 스파르타 왕 레오니다스 1세가 페르시아 사신을 낭떠러지로 걷어차며 “디스 이즈 스파르타”(This is Sparta·이게 바로 스파르타다)라고 외치는 바로 그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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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톤 전투, 페르시아와 아테네의 충돌
최 교수는 마라톤 전투가 양국의 전략이 정면으로 충돌한 전투였다고 봤다. 페르시아는 8월에 마라톤 해변에 상륙했는데, 이 시기는 스파르타 군이 움직일 수 없는 종교적 축제 기간이었기 때문에, 군사 강국인 스파르타의 개입을 막은 것이다. 한편 페르시아는 아테네가 참주정에서 민주정으로 바뀌면서 쫓겨난 히피아스 참주를 포섭한다. 히피아스가 후방에서 아테네로 침투해 옹호세력들을 모아 반란을 일으키면 무혈입성이 가능하다는 포석이었다.
그리스군을 이끄는 사령관 밀티아데스는 페르시아군을 마라톤 평원에서 막아야할지 아테네까지 불러들인 뒤 격퇴시켜야할지를 고심했다. 결국 밀티아데스는 마라톤 평원의 전투를 선택했고 9000명의 중장보병을 마라톤 평원에 투입하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30㎏이 넘는 갑옷과 방패로 무장한 중장보병은 움직임이 둔해 페르시아군의 주력인 기병을 상대하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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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교수는 1차 페르시아 원정이 실패로 돌아간 결정적인 이유로 마라톤 평원 전투 직후 아테네 연합군이 발휘한 시민 정신에 있다고 강조했다. 최 교수는 “무거운 장비를 짊어진 시민군 중장보병이 제 시간에 아테네에 도착하기 위해 전속력으로 진군했기 때문에 페르시아군을 막아낼 수 있었다”며 “노예가 중심인 페르시아군과 달리 자신의 국가와 가족을 지키기 위해 42㎞를 주파할 수 있었던 시민군의 정신과 투혼이 아테네 승리의 비결이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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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원정 실패 이후 다리우스 1세는 이집트 지역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다가 병사하고, 크세르크세스 1세가 뒤를 잇는다. 그는 영화 ‘300’에서 ‘아임 제너러스’(I’m generous·나는 관대하다)라는 대사로 유명하다. 크세르크세스 1세는 이집트와 바빌로니아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한 후 그리스로 대규모 원정군을 직접 이끈다. 페르시아 전쟁사를 기술한 역사가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당시 원정군의 규모는 260만명에 달했다.
크세르크세스 1세는 선대의 실패에서 교훈을 얻어 무려 4년간 원정을 준비한다. 그리스 도시국가 중 스파르타와 아테네에 적대적인 나라들을 포섭하고 그리스 북쪽 세력을 규합한다. 5곳의 식량창고를 만들어 대규모 원정군의 보급책을 미리 마련했다. 최초 원정에서 폭풍우로 함대를 잃었던 아토스산 뒤편에 운하를 만들어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했다.
아테네도 승리에 취해 있지 않았다. 아테네는 10년간의 휴전기 동안 테미스토클레스의 주도 아래 중장보병 중심에서 해군 중심으로 체질 개선을 시도했고, 그 결과 삼단갤리선 200척을 확보한다. 또한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아테네와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헬라스 동맹’을 결성하고 페르시아의 침공에 대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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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곡 전투 후 페르시아군이 한 달 만에 아테네에 진입하자, 테미스토클레스가 이끄는 그리스 해군은 페르시아 함대와 전면전을 결정한다. 이 전투가 바로 살라미스 해전이다. 이 해전에서 그리스 해군은 배를 서로 부딪는 충각 전법과 후퇴하는 척 페르시아 함대를 속이는 기만 전략을 활용한다. 테미스토클레스의 전략으로 200여척의 페르시아군 전함은 궤멸됐고, 페르시아의 2번째 원정은 실패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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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BC 449년 양국이 칼리아스 화약을 맺으면서 40년에 걸친 치열한 전쟁을 마무리 지었고, 그 과정에서 아테네는 라이벌 스파르타를 제치고 그리스의 패권을 잡는다. 아테네는 전쟁에서 공을 세운 4만여명을 시민으로 인정했다. 민주주의 체제가 정착하게 된 계기다.
최 교수는 “스파르타에 밀리는 소국이었던 아테네가 페르시아 전쟁을 거치면서 그리스의 패권국으로 부상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다양한 민의를 수용하고 이를 정치에 반영하는 민주주의 체제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총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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