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탐구생활] 노무현의 도전과 험지출마 나비효과

총선 시즌이면 되풀이되는 험지출마 논란
‘험지출마 원조’ 노무현, 2002년 대선 기적
盧 성공 이후 여야 수많은 노무현키즈 등장
  • 등록 2020-02-12 오전 6:02:00

    수정 2020-02-12 오전 6:02:00

16대 총선을 앞두고 선거유세에서 연설하는 노무현 후보(사진=노무현재단)
[이데일리 김성곤 기자] ‘험지(險地) 출마’

험난한 땅, 다시 말해 당선이 어려운 지역에 출마한다는 의미다. 평소에는 듣기 힘든 표현이다. 4년마다 돌아오는 총선 시즌에만 유행가처럼 흘러나온다. <여야 지도부, 중진 ‘○○○’에 험지출마 요청> <○○○ 의원, 험지출마 반발…무소속 결심> 등의 기사가 대표적이다. 물갈이와 인적쇄신 등 공천작업에서 높아진 국민 눈높이를 맞춰야 하는 여야 지도부가 주로 다선 중진 의원들에게 요청한다.

다만 ‘낙선=정치적 사망선고’라는 점에서 해당 정치인들이 흔쾌히 험지출마를 수용하기란 쉽지 않다. 이 때문에 험지출마는 사실상 솔선수범 또는 자기희생의 동의어로 쓰인다. 상대적으로 당선이 손쉬운 텃밭 공천을 노리는 눈치보기가 극심한 상황에서 험지출마는 분명 용기있는 행동이다. 해당 정치인이 험지출마를 수용할 경우 박수와 칭찬이 뒤따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사지(死地) 출마’

말 그대로 ‘죽음의 땅’이다. 당선 자체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경우를 ‘사지(死地) 출마’로 볼 수 있다. 험지출마의 경우 당선이 어려울 뿐 가능성이 제로는 아니다. 사지출마는 말그대로 제로다. 한국정치에서 영호남 지역주의 장벽이 여전히 강력하게 작동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한국당 소속 영남 지역구 의원이 광주나 목포 등 호남지역에 출마하는 것이다. 결과는 거의 100% 낙선이다.

민주당 소속 호남 지역구 의원이 부산이나 대구 등 영남에 출마해도 마찬가지다. 낙선 확률은 100%에 가깝다. 민주화의 양대 산맥이었던 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이 살아돌아와 각각 광주와 대구에 출마한다 해도 결과는 비슷할 것이다. 바보가 아닌 이상 사지출마를 선택할 정치인은 아무도 없다. 여야 지도부가 또한 사지출마를 강요할 수 없다. 사지출마는 오히려 정치를 희화화시킨다는 비판에 직면할 가능성이 크다.

‘자발적 험지출마’

고통스럽지만 험지출마는 도전할 가치가 있다. 원조는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다. 1988년 13대 총선을 거쳐 국회의원 배지를 단 노무현 전 대통령은 전국적인 청문회 스타로 거듭난다. 이후 고난의 연속이었다. 3당합당 거부로 92년 14대 총선에서 낙선했다. 이어 95년 부산시장 선거에서도 고개를 숙였다. 98년 서울 종로구 보궐선거에서 간신히 배지를 달았다. 이후 2000년 16대 총선에서 ‘당선이 유력했던’ 종로가 아닌 ‘당선이 불투명했던’ 부산을 선택했다.

모두의 반대를 물리치고 고집 아닌 고집을 부린 결과는 처참했다. 또다시 낙선이었다. ‘바보 노무현’의 시작이었다. 돌이켜보면 노무현 전 대통령의 험지출마는 모두 실패했다. 그러나 노무현 전 대통령의 끝없는 도전은 2002년 대선에서 기적적인 승리를 이끌어낸 원동력이 됐다. 결과적으로 정치 역시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High risk high return)이다.

‘노무현키즈의 도전’

험지출마는 여전히 꺼려지는 것이다. 인지상정이다. 떨어질 곳에 나갈 바보같은 정치인은 없다. 다만 노무현의 성공 이후 여야를 가리지 않고 수많은 정치인들이 도전에 나섰다. 이른바 노무현 키즈들이다. 박찬호·박세리·김연아 선수의 성공 이후 각 분야에서 수많은 키즈들이 생겨난 것과 마찬가지다. 대표적인 사례가 김부겸 전 행안부 장관과 이정현 전 새누리당 대표다. 이들은 기득권을 버린 채 실낱같은 당선 가능성에도 도전했다.

실패가 거듭됐지만 마침내 기적이 만들어졌다. 김부겸 전 장관은 민주당의 불모지 대구에서 승리하며 제2의 노무현이라는 호평 속에 일약 차기주자로 발돋움했다. 이정현 전 대표 역시 한국당 계열 정치인으로는 사상 첫 호남지역 재선이라는 금자탑을 이룬 뒤 2016년 새누리당 전당대회에서 당 대표에 오르는 기적을 만들기도 했다. 험지출마라는 노무현 키즈들의 도전이 이어지면서 한국정치 최악의 고질병인 지역주의도 서서히 금이 가고 있다.

‘험지출마의 나비효과’

나비효과라는 말이 있다. 미세한 변화나 작은 사건이 향후 전혀 예상치 못한 엄청난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중국 베이징에서 나비의 작은 날갯짓이 지구 반대편인 미국 뉴욕에서 폭풍우와 같은 변화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 험지출마는 정치분야에서 엄청난 나비효과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영남에서 호남으로 가거나 혹은 호남에서 영남으로 지역구를 이동하는 식의 험지출마는 사실 없다. 현실화된다 해도 유권자들이 동의하기보다 오히려 반발할 가능성이 높다.

여야에서 거론되는 험지출마는 소속 정당에 따라 각각 영호남 강세 지역이 아니라 수도권 접전 지역으로 출마해달라는 요구다. 당선되면 정치적 체급은 수직상승한다. 대권을 꿈꾸는 정치인이라며 더더욱 해볼 만한 도전이다. 낙선의 아픔은 쓰라릴 수 있겠지만 도전하지 않으면 미래를 기약할 수도 있다. 물론 원내 진입에 실패하면 대권도전은 물거품이 될 수도 있다. 그래도 유력 중진 의원이라면 사실 국회의원을 한 번 더 하는 건 크게 의미가 없다. 험지출마는 무모한 도박이 아니라 감당해볼 만한 리스크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삶이 이를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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