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천년 영화가 무상, 텅빈 절터에서 마음을 비우다

강원도 원주 폐사지 여행
흥법사지~법천사지~거돈사지
왕건의 왕사였던 진공대사 머문 흥법사
마을전체가 사찰터였던 법천사지
거돈사의 흥망성쇠 지켜본 느티나무
  • 등록 2021-01-08 오전 6:00:00

    수정 2021-01-08 오전 6:00:00

강원 원주의 거돈사지 석축 위에서 1000년을 자란 느티나무


[원주=글·사진 이데일리 강경록 기자] 강원도 원주. 이 땅에는 이름난 폐사지 세 곳이 있다. 폐사지란 ‘사찰이 허물어져 흩어진 터’를 말한다. 망한 옛 사찰이라는 뜻이다. 흥법사지와 거돈사지, 그리고 법천사지가 그런 곳이다. 모두 신라 말기에 창건해 번영을 누리다 임진왜란 등을 거치며 사라진 옛 사찰터다. 이런 곳에 뭐 대단한 게 있을까 싶지만, 사실 그런 것은 없다. 짓밟히거나, 불타고 남은 것들이다. 흩어져 버린 석물과 탑, 나뒹구는 부재…. 그리고 켜켜이 시간이 쌓인 절터만 덩그러니 남았다. 차가운 들판에 눕고 앉은, 그리고 쓰러져 여기저기 어지럽게 널려 있는 그런 것들이다. 꺾일줄 모르는 전염병의 기세에 조용히 홀로 다녀온 새해 첫 여행이다.

흥법사지 진공대사탑비의 비석은 사라지고, 귀부와 이수, 즉 비석 머리와 받침인 거북 돌만 남아 있다


고려 태종 왕건의 스승이 머문…흥법사지

흥법사지 진공대사탑비의 이수에 새겨진 용2
가장 먼저 도착한 곳은 지정면 안창리의 흥법사지. 남한강과 만나기 직전인 섬강변 구릉 위에 터를 잡았다. 영봉산 자락이 감싸고 있어 아늑한 느낌이다. 흥법사는 도대체 어떤 사찰이었을까. 이 터에 세워진 진공대사탑비에는 진공대사가 태조 23년(940년)에 이곳에서 입적했다는 기록이 있다. 탑비에 쓰인 당시 사찰의 명칭은 흥법선원이었다. 이 글로 보아 이미 신라 말에 큰 규모의 사찰이 있었을 터. 대지만 무려 약 33만㎡(약 1만평)에 이르렀다고 한다.

진공대사는 고려 태조 왕건이 스승으로 모셨던 왕사(王師)였다. 그만큼 흥법사의 위세도 대단했을 터. 진공대사가 입적한 뒤 그를 기리는 탑비 또한 아주 호화롭게 지었다. 왕건은 직접 탑비의 비문을 지었다.

지금 이 땅엔 과거 흥법선원의 영화는 없다. 영화는커녕 오히려 초라할 정도. 절 입구에는 축대를 쌓아 단을 만들었고, 이 축대 뒤편으로 넓은 평탄지가 펼쳐져 있다. 그 중심에 삼층석탑이 세워져 있고, 석탑 뒤편으로 진공대사탑비가 있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바로 이 진공대사탑비다. 비석은 사라지고 귀부와 이수, 즉 비석 머리와 받침인 거북 돌만 남아 있다. 그 위에 있었을 부도비 일부와 부도는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가 보존하고 있다. 귀부에 새겨진 여덟 마리 용의 형상은 탄성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마치 구름 속에서 머리를 내밀고 꿈틀거리는 용의 힘과 기운이 그냥 느껴질 정도다. 폐사지 대부분이 개인 소유로 아직 발굴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점은 아쉬운 대목이다.

법천사지의 흥망성쇠를 모두 지켜봤을 느티나무


비석 위에 새겨진 도솔천이 압권…법천사지

법천사지에 남아있는 국보인 지광국사 탑비
흥법사지에서 나와 법천사지로 향한다. 명봉산 자락 아래 자리하고 있다. 절이 융성할 당시에는 마을 전체가 사찰일 정도로 사세가 컸다고 한다. 오죽하면 마을 이름도 부론면 법천리라고 불렀을 정도. 고려시대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지만, 임진왜란 때 불탄 이후 다시 일어서지 못했다. 커다란 느티나무 고목이 보이면 그 일대가 모두 절터다. 아직 발굴조사가 진행 중이라 전체적으로 어수선하지만,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비가 서 있는 낮은 산자락 주변은 석축부터 깔끔하게 복원했다.

이곳에서 놓쳐서는 안될 유물이 현묘탑과 탑비다. 고려 역대 왕들이 왕실로 초대해 법문을 들었다는 지광국사의 것이다. 고려 문종도 지광국사와 가까이 지냈는데, 넷째 아들을 출가시켜 그에게 맡겼을 정도다. 그 아들이 훗날 대각국사 의천이다. 현묘탑은 고려 최대의 걸작으로 꼽히는 국보. 일제강점기 오사카로 반출됐다가 반환됐다. 지금은 서울 경복궁 경내에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이전하면서 옮겨가려 했지만, 원형 훼손을 우려해 경복궁에 남겨뒀다고 한다.

그래도 탑비는 남아있다. 탑비 역시 국보다. 무른 돌인 점판암 양쪽 모서리에 비늘 하나하나를 뚜렷하게 새긴 용을 그려 놨다. 비석 위에는 글과 함께 마치 펜으로 그린 듯한 다양한 그림과 문양을 새겼다. 특히 비석 위쪽에 그려진 도솔천은 압권이다. 미래의 세상에 도래하는 미륵불이 그 아래서 설법한다는 용화수를 비롯해 9개의 바다와 8개의 산, 삼족오와 보름달 속의 토끼 등이 마치 비누 조각처럼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거돈사지 삼층석탑


천년의 무상한 시간과 만나다…거돈사지

거돈사지 원공국사승묘탑, 진품은 경복궁에 있고, 거돈사지에는 복제품이 있다.
부론면 정산리 현계산 아래에 자리한 거돈사지로 향한다. 절터에 이르자, 먼저 웅장한 석축과 거대한 느티나무가 나그네를 맞는다. 느티나무의 뿌리가 석축의 커다란 돌을 품고 있는 모습이 이채롭다. ‘돌을 먹는 나무’로 부르기도 한다. 아닌게 아니라 뿌리가 바위를 물고 있는 듯 보인다. 이 나무의 수령은 무려 1000년. 거돈사가 지나온 흥망성쇠의 시간을 다 보았을 만큼 나이를 먹었다.

석축 사이 돌계단을 오른다. 계단 끝에는 거돈사지 삼층석탑(보물 750호)이 차츰 모습을 드러낸다. 이어 광활한 폐사지 터가 펼쳐진다. 삼면이 야트막한 구릉으로 닫혀있어 아늑한 느낌이다. 곳곳에 주춧돌로 건물터를 구획해 놓았다. 강당과 요사, 법당 자리는 흙으로 돋아 두었다. 이 흔적만으로도 당시 건물 규모를 짐작할 수 있을 정도. 웅장했던 거돈사지의 위용을 상상해 본다.

거돈사지 중심에는 삼층석탑이 당당하게 서 있다. 이 탑 하나만으로도 빈 공간이 꽉 차는 느낌이다. 탑 뒤쪽으로 금당이 들어섰던 자리. 본존불의 대좌로 쓰였을 법한 바위가 있다. 그 크기로 보아 2~3층 높이의 웅장한 목탑 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절터 한쪽에는 원공국사승묘탑비가 있다. 단정하고 소박한 장식미가 돋보이는 탑비다. 탑비의 머리는 문막읍 비두리 부근에서 가져왔다. 당시 비석 머리가 넘어간 곳이라 해서 ‘비두네미’라고 불렀다고. 지금의 비두리란 마을 이름의 유래다.

함께 세워져 있는 승묘탑은 복제품이다. 진품은 일제강점기에 반출돼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졌다. 복제품이라 하더라도 진품과 거의 똑같이 재현해 놓았다. 해질 무렵 바라보는 삼층석탑이 거느린 빈터의 풍경이 자못 감동적이다. 지금은 서로 거리를 두어야 하는 시기. 당장은 아니라도 조금 더 가까워져도 좋은 시기에는 꼭 찾아가보길 권한다.

해질 무렵 거돈사지 삼층석탑과 본존불의 대좌로 쓰였을 법한 바위가 있다.


여행팁

원주 폐사지 여행의 마무리는 국립중앙박물관과 경복궁이다.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국보 제101호)은 경복궁에 있는 국립고궁박물관 뒤뜰에, 원주 거돈사지 원공국사탑(보물 제190호)과 원주 흥법사지 염거화상탑(국보 제104호), 원주 흥법사지 진공대사탑 및 석관(보물 제365호)은 국립중앙박물관 야외에 있다. 모두 일제강점기에 옮겨진 것이다.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에 있었다면 더 좋았을 유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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