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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5년 12월 서울 강서구의 한 다세대주택 골목. 다닥다닥 붙어있는 주택가 전체를 화마(火魔)가 삼키기 전 반지하층에서 치솟은 불길을 서둘러 진화해야 했다. 소방대원 A씨는 진화장비가 진입하기 위한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반지하층 빗물막이 지붕을 부숴야만 했다. 불은 껐지만 피해 보상이 문제였다. 고의나 과실로 인한 피해가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지 못할 경우 해당 소방관이 책임을 져야하는 현행 보상규정 때문이다.
소방대원들은 목숨을 걸고 화재와 싸운다. 하지만 화재진압 과정에서 파손한 집기나 건축물에 대한 손해보상 요구에 시달리기 일쑤다. 심지어 소방대원이 사비를 털어 보상하는 경우도 심심찮게 발생한다. 집기 파손 등이 고의나 과실없이 진화과정에서 불가피했다는 점을 인정받아야 보상책임이 면책되는 탓이다. 관련제도 개선이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불 끄려고 문 부쉈다가 사재 털어 변제도
서울소방재난본부가 자체 조사한 결과 지난 2015년부터 올해 상반기까지 2년 6개월간 화재진압 등으로 인한 기물파손을 소방대원이 사비로 변제 하거나 변제를 요구받은 사례는 총 54건으로 집계됐다. 방화문·잠금장치(도어록) 파손 보상이 43건(79.6%)으로 가장 많았고 차량·간판·지붕 파손 보상이 8건(14.8%), 기타 보상 3건(5.6%) 등의 순이었다. 그러나 서울소방재난본부측은 실제 사비로 변제한 사례는 월등히 많을 것으로 추산한다.
서울소방재난본부 관계자는 “이번 통계는 유선으로 실시한 간이 조사한 결과에 불과하다”며 “전자 공문을 통해 전수 조사를 실시한다면 사비로 변제한 건수는 훨씬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시의회와 부산시의회도 각각 올해 3월과 5월 비슷한 내용의 조례를 만들었다. 문제는 조례를 실행하기 위해서는 시행규칙을 제정해야 하는데 서울시와 경기도는 아직 시행규칙을 마련하지 못한 탓에 무용지물이다.
서울시와 경기도 관계자는 “결국 집단보험으로 처리해야 하는데 보험사가 요구하는 보험료가 기존 구급대원들을 대상으로 한 구급·구조보험에 비해 과도하게 높아 시행규칙을 제정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말했다.
앞서 국회는 지난해 4월 소방기본법(소방법) 개정해 구조·구급 과정에서 발생한 물적 손실은 모두 국가가 보상하도록 했다. 법 개정 이후 전국 소방서는 집단 운전자보험 및 특약보험 가입해 구급·구조대원들이 공무 수행 중 발생한 사고로 인한 피해는 구급대원의 과실로 인한 경우에도 집단보험으로 처리하고 있다. 상해 이상의 피해를 입은 일반차량 운전자에게 형사고발을 당한 경우에는 변호사 선임 비용과 형사합의금을 각각 최대 500만원과 2500만원까지 지원한다.
서울소방재난본부 관계자는 “법 개정 당시 사고 횟수가 많은 구조·구급대원, 출동 중 발생한 운전자의 사고나 물적 손실 비용 지원이 우선 논의가 되다보니 상대적으로 사고 횟수가 적고 출동 이후 발생할 수밖에 없는 화재진압 대원들의 손실 비용 지원을 다루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이에 앞서 공무 중 발생한 사고나 물적 손실에 대해 소방대원의 민·형사상 책임을 아예 면제해주는 내용을 담은 소방법 개정안을 윤관석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발의했지만, 국회 안전행정위원회 법안 소위에서 1년째 계류 중이다.
지자체들이 조례로 정한 방식은 면책이 아닌 지원인 만큼 여전히 소방대원이 소송에 휘말릴 가능성이 있다. 이에 법적으로 아예 책임을 묻지 못하게 차단함으로서 소방대원을 상대로 보상을 요구하지 못하게 하겠다는 것이다.
대한변호사협회(대한변협) 소방관법률지원단 선종문(42) 변호사는 “집단보험 지원은 소방관에게 금전적으로 ‘지원’하는 방식이지 책임을 면제하는 게 아니어서 심적 부담은 남게 된다”며 “법률안 통과가 시급하다”고 말했다.
김지은(39) 이화여대 뇌인지과학과 교수는 “외상 사건과 관련해 보상이나 법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경우에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가 만성화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며 “공무 중 타인의 재산상 피해를 사비로 보상하게 된 소방대원들의 경우 마치 생산직 노동자가 산업재해를 당하고도 법적으로 인정받지 못해 보상을 받지 못하는 심리와 유사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