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기환의 홍보에 울고 웃고)바나나 대소동

  • 등록 2007-04-18 오전 10:56:27

    수정 2007-04-18 오전 10:56:27

[이데일리 문기환 칼럼니스트]올 1월부터 수입자유화 품목으로 바뀐 바나나가 홍수처럼 반입되고 있다. 7월까지의 수입물량이 지난해 전체 수입의 무려 12배에 달하고 있다. ... (중략) 수입업자들의 무분별한 과잉수입으로 바나나의 시판가격이 폭락하고 있다. .... (중략) 일부 바나나는 저온창고를 얻지 못해 그대로 썩어 폐기되고 있다.』

1991년 7월, 어느 종합일간지의 기사를 발췌한 것이다. 아직 양국 의회의 비준이라는 마지막 절차를 남겨두고는 있지만 이달 초에 있은 역사적(?)인 한미 FTA 체결이 대다수 언론의 긍정적인 대접을 받았는데 비해, 16년 전에는 높은 관세를 내고 수입한 바나나가 사회에 큰 문제를 일으켰고 언론으로부터도 맹비난을 받았으니 그야말로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하여튼 수입자유화 정책 덕분에 그 시절 이후부터 우리나라 대부분의 아이들은 소풍 갈 때에나 한 두개 먹어 볼 수 있었던 귀한(?) 바나나를 원 없이 먹을 수 있게 되었지만 말이다. 다음에 소개할 에피소드는 바로 그 무렵 종합상사인 (주)대우에서 벌어진 일이다.

어느 날 오전 10시경이었다. 체격이 좋은 젊은 남자 한 명이 홍보부 사무실을 들어 서더니, 다짜고짜 부장을 찾는다. 정장 양복을 입고 넥타이는 맸지만 인상을 험하게 짓고 말투도 곱지 않아 당황하고 있었는데, 통성명을 해보니 예상 밖으로 어느 유명 일간지의 A기자였다. 단, 사회부라는 글자를 볼펜으로 지우고 경제부로 써 넣은 명함을 보니, 사회부에서 이제 막 경제부로 부서 이동을 한 기자임에 틀림없었다.

기자실로 자리를 옮긴 A기자는, 대기업인 대우에서 바나나를 수입해 폭리를 취하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이를 자세히 취재하려 왔다고 하며, 당시 홍보과장 이던 필자하고는 대화 상대가 안되니 대신 부장을 만나게 해 달라고 강력히 요청했다. 처음 겪는 일이라 당황스럽고 기분도 좀 상했지만 어쨌든 회사의 홍보와 기획 부서를 함께 맡고 있는 B부장을 소개해 주었다.

B부장은 10여 년을 해외 지사와 본사 무역 부서를 두루 옮겨 다니다가 한 달 전 우리 부서로 자리를 옮긴 자타가 공인하는 무역영업 베테랑이었다. 그러나, 홍보 업무에는 아직 초심자나 다름 없었고 더군다나 경험이 없으니 언론 기자들을 상대하는 노하우(?)는 전혀 백지 상태였다.

두 사람의 대화는 차라리 처음부터 말 다툼에 가까웠다. ‘왜 바나나를 수입했느냐. 그 덕에 바나나 농가가 다 망하지 않았느냐.’ ‘무슨 소리냐, 그 동안 너무 비싸 살 엄두를 못 낸 많은 국민들이 싸게 바나나를 사먹을 수 있으니 얼마나 좋으냐. 수입자유화를 왜 나쁘게만 생각하느냐.’

또, ‘왜 대우 같은 대기업이 바나나 같은 식품류를 수입하느냐. 중소기업들의 영역이 아니냐’ ‘종합상사는 바늘에서 선박에 이르기 까지 다양한 상품을 수출도 하고 수입도 하는 회사다. 생산과 영업, 서비스 활동 등을 통해 정당하게 이익을 창출하는 것이 기업의 역할 아니냐. 바나나 수입이 중소기업의 고유영역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두 사람 모두 얼굴이 벌개져서 도무지 언성을 낮추려 하질 않는다. ‘이래선 안되겠다’고 판단한 필자는 일단 A기자를 기자실로 옮기게 한 후, 사무실과 기자실을 오가며 어찌어찌 중재를 해서 간신히 논쟁을 끝 마치게 했다. 사실, 바나나 수입 관련 사안은 언론사의 경제부 기자와 대기업의 홍보부장 사이의 논쟁거리가 되지 않는 건인데도 불구하고, 한 사람은 사회부 기자처럼, 또 한 사람은 무역업무를 하는 영업부장처럼 행동한 것이다.

그리고 나서, 몇 주일이 흘렀다. 소위 냉각기를 보낸 것이다. A기자가 회사를 다시 찾아왔다. 이번에는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홍보부 사무실을 들어선다. 그러면서 하는 말 ‘경제부에서는 사회부 시절처럼 행동하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난 번에 취한 행동이 본인 생각에도 좀 지나쳤다고 생각한다.’

B부장도 ‘나도 홍보부장을 맡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여러모로 미숙했다. 앞으로 무역관련 문의 사항이나 취재가 있으면 언제든 알려달라. 적극 도와주겠다.’ 논쟁도 화끈하게 했지만 화해도 사나이들답게 멋지게 하는 것을 보고 필자는 한숨을 돌렸다. 왜냐하면, 1~2년 후면 무역 업무로 복귀하는 B부장과 달리 홍보업무를 계속해야 하는 필자는 향후 A기자와 소속 언론사와의 관계가 불편해지면 안되기 때문이다.

이후 경제부 기자 생활을 한동안 계속하던 A기자는 몇 해전 본인의 희망대로 사회부로 복귀해 이제 수십 명의 사건기자를 관리하는 데스크가 되었으며, B부장은 모 대기업으로 자리를 옮겨, 식품관련 계열사의 대표를 지내고 있다.

16년 전 바나나 파동으로 만난 A기자, B부장, 그리고 필자 세 사람은 지금도 1년에 서너 차례 만나며 친밀한 정을 돈독히 하고 있다.

문기환 새턴PR컨설팅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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