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화산에서 김교각 스님을 만난 후 귀국했다. 구화산 사업은 가슴속 깊이 깊이 숨겨 놓았다. 친구, 선후배 등 만나는 사람들은 “중국 잘 다녀 왔느냐? 중국 어때?”라며 묻는다. 1993년 당시 중국 붐이 거셌다. 나는 어느새 중국 전문가 인양 큰 소리 치곤했다. 한마디로 그새 ‘중국 전도사’가 된 것이다.
2개월여 만에 효과가 나타났다. 제법 규모가 큰 건설 회사를 경영하고 있는 고교, 대학 후배가 중국 진출 의사를 전해왔다. 김교각 스님 관련 사업 외에도 그동안 수집, 분석해 놓은 사업건이 10여개 구상해 놓은 상태였다. 그러나 나는 자금이 없었다. 후배가 제시하는 조건으로 그 회사에 입사, 본사 임원 및 북경지사장 자격으로 북경에 등장했다. 그동안 통역을 했던 조선동포 L씨가 있으니 지사 설립, 직원 모집 등 거칠 것이 없었다. 그야말로 북경 한인 사회에 ‘짜장’ 멋지게 등단한 것이다.
후배 회장은 “짧은 기간에 너무 수고 많았다”고 격려한 후 내가 제안한 두 사업을 모두 하자고 내게 힘을 실어줬다. 역시 중국이다. 일주일이 후딱 지나갔다. 상쾌한 마음으로 북경에 돌아왔다. 한식당 주인 C씨도 너무 좋아했다. 그런데 본사에서 인수 가격까지 확정해 놓고는 계약 날짜를 정하지 않고 계속 미뤘다. 한식당 주인은 계속 졸랐다. 본사에선 정확한 답변을 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나중에 알게 됐다. 본사가 부산에 있는 금융기간을 인수하느냐고 다른 곳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북경에 있는 나는 사정을 모를 수 밖에. 금융기관 인수같은 건은 정보가 중요할 수밖에 없다. C씨가 내게 얼굴을 붉히기까지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계약이 성사되면 한국차 수입 관련 사업을 멋지게 벌이려는데 큰일’이라는 것이다. “조금 더 기다려 달라”고 오히려 내가 부탁하는 입장이 되고 말았다.
본사에서 급히 연락이 왔다. 기가 막히는 일이 벌어졌다. 채근하는 전화가 며칠 없어 이상하다 했더니 한식당 주인 C씨가 한국 본사에 나타나 후배 회장을 만나겠다고 우긴다는 것이다.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나? 일도 일이지만 후배 회장에게 북경 지사장인 내 얼굴은 도대체 어찌되는 것인가? 급히 후배 회장에게 직통 전화를 해 “회사에 찾아 왔다고 하니 우선 만나 보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1시간 뒤 후배 회장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통화 시간 1분. “그 사람 너무 무례한 사람이다. 식당 인수 가격을 좀더 낮추어 줄테니 급히 계약을 하자고 한다. 더 따질 것 없이 없었던 일로 하자. 주상복합 사업이나 잘 챙겨보라.” 억장이 무너져 내렸다. 중국 전문가. 전직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