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후보분석-서울]'기업가 출신 정치인' vs '시민운동가 출신 시장'

  • 등록 2014-05-19 오전 10:19:46

    수정 2014-05-19 오전 10:23:38

[이데일리 박수익 기자] 서울시장 선거는 역대 지방선거 승패에 결정적 영향을 미칠 정도로 정치적 의미가 크다. 인구 1000만명, 예산 20조원이라는 규모의 상징성뿐만 아니라 서울시장 당선자는 곧 가장 유력한 차기 대권후보라는 점에서 정치적 무게감도 상당하다. 이번 선거에서 서울시장 자리를 놓고 맞대결을 펼치게 된 정몽준 새누리당 후보와 박원순 새정치민주연합 후보는 소속 정당뿐만 아니라 ‘기업가 출신 국회의원’과 ‘시민운동가 출신 시장’이라는 확연히 다른 삶의 궤적을 가지고 있다. 그만큼 역대 어느 선거 때보다 뚜렷한 대결구도가 펼쳐지고 있다는 분석이다.

새벽을 맞이하는 서울 노량진수산시장. 선거철이면 후보들이 단골로 찾는 곳이다. 박원순 후보는 지난 16일 새벽 이곳을 찾았고, 정몽준 후보도 시장 출마를 선언한 지난 3월 방문했다. 사진=채상우 기자


鄭, 현역 최다선…토론서 친박 자처했지만 비주류 중진

집권여당 서울시장 후보로 나선 정몽준 후보는 1951년 10월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6남으로 부산에서 태어났다. 1982년 당시 32세의 나이로 현대중공업 대표이사(사장)에 올랐던 그가 국내 굴지 대기업 경영인에서 제도권 정치인으로 변신한 시점은 1988년이다. 37세에 ‘현대 왕국’인 울산 동구에 무소속으로 출마한 이후 같은 지역구에서 내리 5선에 성공했다. 2008년 총선에는 서울(동작을)로 지역구를 옮겨 당선됐고, 19대 총선에서도 승승장구하며 현역 최다선인 7선 고지에 올랐다.

그는 정치인으로서 뿐만아니라 체육계에서도 굵직한 발자취를 남겼다. 현대중공업 대표이사 시절 대한양궁협회 회장(1983년)과 실업테니스연맹 회장(1984년)을 맡기도 했지만 대중적 인지도를 높인 계기는 축구였다. 1993년 대한축구협회장에 선출돼 월드컵 유치에 본격적으로 나섰고, 국제축구연맹(FIFA) 부회장과 2002년 월드컵대회 조직위원장 등을 맡아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주가를 높였다. 특히 2002년 월드컵을 계기로 치솟은 인지도는 그가 ‘대권’ 도전의 길로 들어서는 결정적 배경이 됐다.

그러나 ‘국민통합 21’ 후보로 출마했던 그는 당시 노무현 민주당 후보와 단일화 이후 막판에 지지를 철회하며 정치인생 최대 위기를 맞기도 했다. 이후 한동안 정치적 소강기를 겪다가 2007년 한나라당에 입당했고, 2009년에는 한나라당 대표로 선출되며 다시 재기의 발판을 마련했다. 정 후보는 지난 2012년 대선 때도 당내 경선 출마를 선언했지만, ‘박근혜 대세론’ 속에 일찌감치 불참했다.

2012년 대선 이후 친박계가 당 주류를 형성한 가운데 상대적으로 조용한 행보를 이어오던 정 후보는 올 초만 해도 서울시장 출마에 대한 명확한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그러나 당 안팎의 ‘중진 차출론’ 속에 출사표를 던졌고, 지난 12일 경선에서 김황식 전 국무총리와 이혜훈 새누리당 최고위원을 압도적 득표차이로 꺾고 본선행 티켓을 거머쥐었다.

정 후보는 경선 당시 TV토론에서 ‘친박이냐’는 질문에 주저없이 ‘O’ 팻말을 들었지만, 당내 정치지형에서는 엄연히 친박(친박근혜계) 주류와 거리를 둔 비주류 중진이다. 그는 지난 14일 서울시장 선거 출마를 위해 국회의원직을 사퇴하면서도 “대통령이 정치를 멀리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고, 세월호 참사는 집권여당인 새누리당이 특별히 반성해야한다”며, 쓴소리를 보탰다.

정몽준 새누리당 후보와 박원순 새정치연합 후보가 18일 북한산에서 열린 서울시장기 국민생활체육등산대회에 나란히 참석했다. 사진=채상우 기자


朴, 인권변호사·시민운동가 출신.. 보궐선거 통해 제도권 입문

박원순 후보는 새정치민주연합이 일찌감치 단수후보로 확정해 본선에 직행했다. 그는 2011년 서울시장 재보궐선거에 나서기 전까지 제도권 정치와 거리를 둔 인권변호사와 시민운동가로 살아왔다.

1956년 경남 창녕 농가에서 2남5녀 중 여섯째로 태어난 박 후보는 서울대 사회계열에 입학한 1975년 긴급조치 9호에 반대하는 교내시위에 단순가담했다 투옥되면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는다. 투옥으로 서울대에서 제적된 그는 단국대 사학과에 입학했고, 80년 사법고시에 합격했다.

82년 대구지검 검사로 발령받았지만 1년 만에 그만두고 당시 운동권의 전설로 불리던 조영래 변호사와 함께 ‘부천서 성고문 사건’을 맡으며 인권변호사의 길을 걸었다. 이후 ‘미국문화원 점거농성 사건’ 등 굵직한 시국사건을 맡으며 이름을 알렸다.

당시 조 변호사 등과 함께 만든 ‘정법회’는 이후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으로 확대됐다. 90년대 초 영국 유학길에 올랐던 그는 귀국 후 94년에 시민단체의 대명사로 여겨지는 참여연대 설립을 주도하며 시민운동가로 변신했다. 특히 참여연대 시절 ‘1인 시위’라는 새로운 시위문화를 만들었고 사법개혁운동(1995년) 소액주주운동(1998년), 예산정보 공개운동(1999년) 낙천·낙선운동(2000년)도 주도했다. 2000년 참여연대를 떠나 아름다운재단과 아름다운가게를 만들었고, 2006년에는 희망제작소를 설립했다.

그는 시민운동가의 길을 걸으면서 여야정치권으로부터 여러 차례 ‘러브콜’을 받기도 했지만 모두 거절했다. 그러나 2011년 8월 무상급식 주민투표 무산으로 오세훈 당시 서울시장이 사퇴하면서 치러진 10·26 재보궐선거를 통해 정치인으로서 본격 데뷔했다.

재보선 도전 당시 초반에는 지명도가 미미했지만,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원장과의 단일화 선언으로 지지율이 큰 폭으로 상승했다. 이후 범야권 국민참여경선에서 박영선 민주당 후보를 꺾고 야권 단일 후보로 선출됐고, 본선에서도 나경원 한나라당 후보를 제치고 당선됐다.

약 2년 반의 서울시장 재임 동안 박 후보는 ‘전시행정을 하지 않고, 서울의 살림살이를 개선했다’고 강조하지만, 여당 경선후보들로부터 ‘시민이 원하는 일보다 본인이 하고 싶은 일만 했다’는 지적을 받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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