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준의 키네토스코프] 운수 좋은 날, 사마리아인이 되지 못한 아이들 `글로리데이`

  • 등록 2016-07-29 오후 12:00:00

    수정 2016-07-29 오후 5:03:35

[이데일리 e뉴스 김병준 기자] 이 글에는 영화의 내용과 관련된 직접적인 기술이 상당수 포함돼 있다. 영화를 보지 않았거나 스포일러에 민감한 사람은 서둘러 창을 닫길 바란다. 또한 정보 전달이 아닌 주관적 해석에 입각해 작성한 글임을 밝힌다.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더라도 예술을 대하는 상대적 관점을 바탕으로 한 넓은 아량을 부탁한다.

지금으로부터 100여년 전 이탈리아의 영화이론가 리치오토 카뉴도는 영화를 ‘제7의 예술’이자 기존 예술을 아우르는 ‘종합 예술’로 정의했다. 그렇다면 영상, 음악, 미술 등 다양한 예술적 요소들 가운데 내러티브를 이끄는 영화 속 핵심 장치는 무엇일까? 나는 ‘글’이라고 생각한다.

좋은 글에서 나쁜 영화는 나올 수 있지만, 나쁜 글에서 좋은 영화가 나올 수 없다는 게 내 지론이다. 이같은 연유로 나는 감독이 쓴 영화 속 글,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대사’에 집중해 영화를 감상하는 편이다. 앞으로 대사를 통해 영화를 톺아보면서 감독이 던지고자 했던 메시지가 무엇이었는지, 함께 이야기해 보자.

(사진=영화 ‘글로리데이’ 스틸 이미지)
사실 시간이라는 건 ‘개념 없는’ 개념이다. 쪼갤 수 없는 연속된 흐름으로, 실체 역시 불분명하다. 초, 분, 시 등 시간과 일, 월, 년 등 날짜는 모두 인간이 편의를 위해 만든 가상의 ‘단위’에 불과하다. 그런데 우리는 편리함을 위해 인위적으로 자른 이 개념에 ‘상징’을 부여하고 있다.

대한민국에서 19세 12월31일 오후 11시59분59초까지의 국민은 모두 ‘어른이 아닌 존재’다. 이들은 아이, 청소년, 10대, 학생, 미성년자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다. 하지만 1초가 지나 20세 1월1일 오전 0시0분0초가 되면 이들은 법적으로 ‘어른’이 된다. 1초 만에 존재가 바뀌는 이 아이러니는 시간이라는 인위적인 단위의 부산물이다.

최정열 감독의 준독립영화 ‘글로리데이’는 이 경계를 갓 넘은 친구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영화를 ‘준독립영화’로 소개한 이유는 유례없는 관객 동원 때문이다. 올해 3월24일 개봉한 ‘글로리데이’는 전국 493개 상영관에서 18만9087명의 관객을 좌석에 앉혔다. 인기 아이돌그룹 리더의 캐스팅이 스코어에 영향을 미친 건 사실이다. 하지만 작품성도 부족하지 않았다.

영화의 제목 ‘글로리 데이’가 가진 뜻 그대로 이 친구들은 가장 눈부신 순간을 함께했다. 하지만 ‘원 웨이 트립’이라는 부제처럼 이들이 돌아갈 길은 없었다. 세상과 마주한 스무살의 어느 날, 이 친구들의 인생은 잔인하게 구겨졌다. 그렇다면 이들은 대체 무엇을 잘못한 걸까? 사실 잘못한 건 ‘거의’ 없었다. 다만 어른이 되기에는 ‘1초’라는 시간은 턱없이 부족했다.

(사진=영화 ‘글로리데이’ 스틸 이미지)
사람들이 알면 뭐라고 하겠니? 동네 창피하게 왜 이렇게 부모 얼굴에 먹칠을 하고 다녀.

경찰에 붙잡혀 있는 지공(류준열)에게 어머니(문희경)는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무식하게 이게 무슨 짓이니? 동네 창피하게 왜 이렇게 부모 얼굴에 먹칠을 하고 다녀, 진짜”라고 말한다. 두만(김희찬)의 아버지(유하복) 역시 “아빠 말 들어, 이게 다 널 위한 일이니까. 너도 어른이 돼 봐, 아빠가 무슨 말 하는지 그때 이해가 될 테니까”라고 말한다.

원치 않는 재수 중인 지공에게, 야구선수를 강요받은 두만에게 던져진 이 대사는 대한민국 아이들의 처한 현실 그 자체라고 봐도 무방하다. 아이들 다수가 일류대학 진학을 위해 12년 이상 공부를 하고 있으며, 부모는 자식을 명문대에 보내야만 면이 선다. 아직 채 피지도 못한 꽃봉오리 같은 아이들에게 ‘꿈’은 없어진 지 오래며, 부모가 설정해 준 ‘목표’만이 남아 있다.

어른들이 규정한 인생을 살고 있는 대한민국 아이들의 이같은 현실은 비단 어제오늘의 일만은 아니다. 수능 점수로 결정되는 대학이 인생마저 결정하게 되는, ‘반전 없는 대한민국’은 우리 어른들이 오랜 기간에 걸쳐 만들어 낸 곳이기 때문이다. 다만 “너희를 위한 일이다”라는 거짓 정당성과 “어른이 되면 알 수 있다”는 회피성 핑계로 그럴듯하게 포장돼 있을 뿐이다.

다양한 방송에서 마이크를 잡은 아이들이 토로하는 고민은 ‘꿈을 잃어버린 삶’이다. 좋은 대학을 가기 위해 벌이는 무한 경쟁도 우리 아이들에게는 심각한 스트레스가 되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조사한 각국 청소년의 일 평균 학습량과 자살률 등 수치가 이를 뒷받침한다. “부모는 사랑은 주되, 생각은 주지 말아야 한다”는 책 속 구절은 우리에게 생각할 거리를 제공한다.

(사진=영화 ‘글로리데이’ 스틸 이미지)
지금은 진실을 밝히는 게 중요한 게 아니야. 어떻게 이 상황을 수습할까가 중요한 거지.

영화는 진실 규명이 아닌 사고 수습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대한민국의 현실도 직설적으로 보여준다. 영화 속 어른들이 진실을 향했다면 아이들의 비극은 아마도 최소화됐을 것이다. 하지만 어른들은 아이들이 연루된 사건의 진실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대신 어떻게 하면 사건을 빨리 종결할 수 있을지, 혹은 어떻게 해야 내 자식의 혐의를 없앨 수 있을지에만 집중했다.

영화 ‘글로리데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진실이 수습에 의해 소멸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2년 전 진도 앞바다에 빠지며 나라를 비통에 빠트렸던 세월호는 긴 시간이 흘렀음에도 아직 물속에 있다. 부산지역 학교전담경찰관이 담당 학교의 여고생과 성관계를 맺고, 해당 서의 최고 권력자가 이를 은폐하려고 했던 사건도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벌써 잊히고 있다.

얼마 전 동영상이 공개돼 큰 파장을 남겼던 대한민국 최고 대기업 오너의 성매매 스캔들 관련 사건 역시 진실이 명확히 규명되고 있는지 의문이다. 최근 알려진 모 인터넷 종합쇼핑몰 개인정보 유출 사태에서도 업체 측은 진실을 파악하고 원인을 분석하기에 앞서 약관을 변경하며 책임 회피하는 등 이기적인 수습에만 발 빠른 모습을 보였다.

이처럼 규명돼야 하는 진실은 끊이지 않는 사건·사고에 늘 덮히고 있다. 각종 기기를 통해 언제 어디서든 단순 소비되고 즉각 잊혀지는 ‘인스턴트 아티클’ 덕분에 우리는 곧 영화의 결말 같은 엄청난 비극과 마주하게 될지도 모른다. 막이 내려가고 있는 진실의 시대 속에서 금방 어른이 될 아이들에게 진실은 어쩌면 사전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용어일지도 모르겠다.

(사진=영화 ‘글로리데이’ 스틸 이미지)
지나치면 되지, 왜 남의 일에 참견을 하냐고. 니가 도와주면 세상이 아름다워질 거 같디?

앞서 영화 속 아이들의 잘못이 ‘거의 없다’고 표현한 이유는 용비(지수)가 폭력을 막기 위한 수단으로 ‘폭력’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수능을 위한 공부만으로 20여년을 살아온 아이들은 어떤 경우에도 폭력은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것을 배우지 못한 채 어른이 돼 버렸다. 물론 정의 구현을 위한 폭력이었지만, 이날 용비의 정의로움은 비극적 결말의 시발점이 된다.

우리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에 대해 분명히 알고 있다. 자신과 상관없는 일이라고 할지라도 곤경에 처한 사람을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된다는 개념이다. 성서에서 유래된 이 가르침은 맹자의 측은지심 혹은 불인지심과도 일맥상통한다. 하지만 2016년 현재의 모습은 곰곰이 되짚어보자. 우리는 단지 바쁘다는 이유로 또는 귀찮다는 이유로 불의를 그냥 지나치기 일쑤다.

물론 ‘흉흉한 세상’도 원인 중 하나라는 주장에 동의하는 바다. 지나치지 않고 기껏 도움을 줬지만, 오히려 곤란한 일에 휘말리게 됐다는 건 영화 밖 현실에서도 종종 들려오는 이야기다. 그 때문일까? 시대가 변하면서 사마리아인도 변화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피해자를 직접 구제하는 대신 주머니 속 스마트폰을 꺼낸다. 불행 중 다행인지, 다행 중 불행인지는 모르겠다.

영화 초반부에 등장하는 찬송가 ‘마귀들과 싸울지라’ 속 가사처럼 용비, 상우(수호), 지공, 두만은 악에 맞서 담대하게 싸웠다. 하지만 정의로운 어른이 된 이 아이들의 진실을 규명해주기 위해 얼굴에 기꺼이 먹칠을 하는 어른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리고 자신들의 정의를 증명할 수 있는 증거를 기록하지 않은 죄의 대가는 아이들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아이들은 ‘님의 침묵’ ‘관계대명사’ ‘근의 공식’이 아닌, 억울한 상황에 부닥쳤을 때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방법들에 대해 배워야 했다. 하지만 어른들은 단지 면을 세우기 위해 아이들에게 입시를 위한 공부만을 강요했다. 아이들이 진실을 증명할 수 있는 무기를 자가 장착해야 한다는 걸 홀로 깨닫기에 ‘1초’라는 시간은 충분하지 않았다.

영화 ‘글로리데이’는 현진건 선생의 ‘운수 좋은 날’과 닮았다. 소설 속 인력거꾼 김첨지가 실적이 가장 좋았던 날 비극을 맞은 것처럼, 영화 속 아이들 역시 가장 찬란한 청춘의 어느 날 모든 것을 잃게 됐다. 학벌우선주의, 물질만능주의 등 어른들이 만든 대한민국 안에서, 아이들은 정의가 무엇이고 진실이 무엇인지 그리고 스스로를 어떻게 보호해야 하는지 모른 채 어른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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