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P시장의 얼굴없는 미녀

  • 등록 2010-11-04 오후 2:36:38

    수정 2011-04-13 오전 9:15:13

[이데일리 윤영환 칼럼니스트] ‘얼굴없는 미녀’는 김혜수 주연의 영화 제목이지만, 원래는 달걀귀신을 일컫는 말이다. 앞서가던 미녀가 휙 돌아서는데 글쎄 얼굴이 없다.

요즘 CP시장에 얼굴없는 미녀가 여럿 등장했다. 발행규모가 총 2조원을 넘고, 모두 만기가 1년 이상인 장기 CP다. 이름을 보면 ABCP가 분명한데 자산내역은 커녕 신용등급도 공시되지 않는다(대부분의 CP는 금감원의 공시대상이 아니다. 현실적으로 신용평가의 등급공시가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여기저기 알아보니 은행 정기예금을 담보로 발행한 신용등급 A1의 ABCP란다. 인수자인 기관들이 원치 않아 신용등급을 공시하지 않았고, 법적으로도 문제가 없다는 것이 평가사의 설명이다. 법률 지식은 일천하지만 ‘이건 아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공시는 당사자간의 이슈가 아니라 불특정 다수에게 알리는 것이다. 어디까지나 당사자가 아니라 제 3자의 이해관계를 중시하는 것이다. 공시규정은 공모와 사모의 형식을 기준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평가사까지 이 기준을 적용하면 모든 CP 신용평가 기록은 평가사 홈페이지에서 사라져야 한다. ‘인수자들이 원치 않는다’는 논리는 너무나 궁색하다.

제 3자의 이해관계가 전혀 없다면 또 모르겠다. 하지만 이해관계가 얽히고설킨 자본시장에 그런 것이 있던가? 특히 CP는 금융시장의 쏠림과 관련하여 매우 예민한 시장이다. 그 CP시장에 수 조원 규모의 특이 동향이 나타났는데도, 그 내용조차 파악하기 어려운 상황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신용등급 공시뿐만 아니라 장기 CP도 만만치 않은 이슈다. CP는 분명히 단기금융상품인데 최근 시장에는 발행만기가 1년이 넘는 장기 CP가 대거 발행되고 있다. 자본시장법 도입 이후 보완조치 없이 기간 규제를 풀어버린 이후 장기 CP가 점차 늘어나더니, 이제는(10월말 현재) 전체 CP잔액 72조원의 9.6%인 6.9조원에 달한다. 또한 발행만기가 딱 365일인 CP도 7.5조원(10.5%)이나 된다.

미국의 CP 만기는 통상 40일 이하가 주종을 이룬다. 지난 2개월간 발행된 CP의 86%가 만기 40일 이하였다. 반면 같은 기간 발행된 우리나라의 만기 40일 이하 CP는 55%였다. 금액가중 잔존만기는 미국이 48일, 우리나라가 107일 정도다. 전반적으로 보자면 우리나라의 CP 만기가 두 배 정도 길지만 양국 금융시장의 성격 차이를 감안하면 크게 유념할 것은 아니다. 하지만 만기 1년 이상의 장기 CP는 이런 정도의 차이를 넘어선 본질의 문제다. 참고로 미국의 CP 만기는 270일 이하로 규제되고 있다.

장기 CP는 분명히 기업금융의 다양성을 높이고, 발행기업의 편의성을 높이는 효과가 있다. 다 좋은 일이다. 하지만 이미 지켜야 할 선을 넘은 상태에서 긍정적인 측면을 여러 가지로 나열해봐야 다 소용없는 일이다. 아무리 큰 숫자도 제로(0) 값을 곱하면 그냥 제로가 될 뿐이다. 유동성 위기의 홍수를 만나면 단번에 쓸려갈 그런 효율성 개선은 부질없는 모래성일 뿐이다. 그것도 제방을 허물어 쌓은 모래성이다. 장단기 금융시장의 분리와 공시제도는 자본시장의 기본적인 운영원리다. 기본을 넘어서 어떻게 효율을 운위할 수 있겠는가? 그저 두려울 따름이다.

장기 CP가 이런 추세로 확대되면 머지 않아 공모회사채 시장은 설 자리를 잃는다. 공모회사채 시장이 무너지면 회사채 시장 참가자들도 힘들어지고 예산의 20% 이상을 회사채 발행분담금에 의존하는 금융감독당국도 곤란해지겠지만, 정말 답답한 것은 우리나라 기업들이다. 금융시장의 가벼운 충격에도 이리저리 휩쓸리게 될 테니까 말이다.

머지 않아 도입될 단기사채는 만기를 1년 이하로 제한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 제대로 법제화와 보완조치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다. CP가 단기사채로 바뀐다고 기존의 CP인 기업어음이 금지되는 것은 아니지만, 현실적으로 어렵지 않게 완전 대체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었다. 하지만 이처럼 장기 CP의 유인이 큰 상황에서는 순조로운 이행이 가능할지 회의가 생긴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일이야 비일비재하지 않은가?

은행 정기예금 담보 ABCP를 예사로이 보지 않는 특별한 이유가 따로 있다. 전형적인 규제차익(Regulation arbitrage) 상품이기 때문이다. 규제차익은 그 자체로만 본다면 또 하나의 금융혁신이지만, 시각을 달리해 보면 규제장벽을 우회하는 시도다. 금융은 규제에 의해 질서가 지켜지는 시장이다. 제방에 뚫린 구멍을 방치하면 언젠가 꼭 필요한 순간에 제방이 허무하게 무너지는 것을 보게 된다.

“멀리 생각하지 않으면, 반드시 가까이에 근심이 있다.” - 논어 -

윤영환/신한금융투자/Credit analyst

이데일리
추천 뉴스by Taboola

당신을 위한
맞춤 뉴스by Dable

소셜 댓글

많이 본 뉴스

바이오 투자 길라잡이 팜이데일리

왼쪽 오른쪽

스무살의 설레임 스냅타임

왼쪽 오른쪽

재미에 지식을 더하다 영상+

왼쪽 오른쪽

두근두근 핫포토

  • 미모가 더 빛나
  • 빠빠 빨간맛~♬
  • 이부진, 장미란과 '호호'
  • 홈런 신기록
왼쪽 오른쪽

04517 서울시 중구 통일로 92 케이지타워 18F, 19F 이데일리

대표전화 02-3772-0114 I 이메일 webmaster@edaily.co.krI 사업자번호 107-81-75795

등록번호 서울 아 00090 I 등록일자 2005.10.25 I 회장 곽재선 I 발행·편집인 이익원

ⓒ 이데일리.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