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떠오르려는지 머리꼭지에 스치는 한기에 잠이 홀딱 달아났다. 몸을 일으키니 몇 시간 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풍경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산 능선을 보며 오늘 걸어야 할 길들을 가늠해 본다. 배낭을 패킹 후 근처 공원으로 이동하는데 동행한 형은 아침부터 흥이 났는지 배낭에서 뭔가를 꺼낸다. 고기와 벚꽃 잎이 그려진 맥주 한 캔이다. 뭐라고 폭풍 잔소리를 할 새도 없이 프라이팬에 고기를 올려놓고는 어디서 따왔는지 매화꽃을 하나, 두울, 셋… 올려놓는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또 기가 막힌 것인지 낭만적인지. ‘매화꽃 놀이하러 왔는데 매화꽃을 얹어서 먹어야 진정한 꽃놀이’라는 것이다.
유유자적 마을을 한 바퀴 돌아보고 먹점마을에서 제일 높은 지대에 위치한 매실 농장에 연락을 드려 숙영지를 정했다. 농원까지 400m. 다시 재에 오른다고 할 정도로 가파르게 치고 올라가는 걸음이 결코 만만치 않았다. 규모가 상당한 이곳 농원에서 숙영지는 특별히 정해진 곳이 없다며 손님이 체크인 한 숙소 건물 외에 본인이 치고 싶은 곳에 텐트를 치라고 말씀해 주신다. 게다가 감 말랭이, 매실 말랭이, 황금차까지 이곳에서 나는 농산물을 맛보라고 내어주시기까지 하시니 길 위의 호사도 이른 호사가 없다. 사장님의 배려로 매화나무 아래 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텐트를 치는 동안에도 매화향이 바람에 날려 코끝을 간질였다.
봄, 사계절 중 제일 어여쁜 이름 아니던가. 이 부드러운 단어는 칙칙한 중년 아저씨들도 꽃 중년으로 만들고, 내쉬는 숨 한끝마다 생명을 불어 넣는 힘이 있다. 발걸음 한 발자국씩 옮길 때마다 코끝으로 스치던 진한 매화향을 따라 걸었던 길. 온 세상이 외치는 봄이라는 계절에 우리는 더 특별한 봄맞이를 했다. 어쩌면 먼 훗날. 허리가 구부러지고 다리 힘이 없어 걷지 못하는 시간이 왔을 때 말이다. 따스한 봄 햇살 아래 앉아 과거의 시간들을 얘기할 때면 ‘그해 봄에 매화향에 취해 봄과 놀았다’라는 것을 잊지는 않겠지. 젊은 시절 한 자락이나마 한량이 되어 즐기던 꽃놀이 추억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