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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오후 1시 39분쯤 파란색 수의를 입고 법정에 등장한 이춘재는 반 삭발한 상태였다. 남은 머리카락은 희끗했고 이마에 굵은 주름 한 줄이 있었다. 공개된 젊은 시절 사진처럼 눈썹이 반 잘려 있는 모양이었고 눈매는 날카로웠으며 큰 귓불을 갖고 있었다. 흰색 헝겊 마스크를 착용하고 입장했지만 추후 일회용 마스크로 고쳐 썼다.
이춘재 사건을 다룬 영화 ‘살인의 추억’(2003)에서 유력 용의자의 인상 착의로 언급된 것처럼 손이 여성처럼 고와 보이지는 않았다. 손이 크고 두꺼운 편이었다.
“올 것이 왔다…범행 당시는 어찌 저질렀는지 잘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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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심 청구인 측 박준영 변호사가 “작년 (교도소) 공장에서 일하던 중 경기도에서 자신을 조사하러 왔다는 얘기를 듣고 무슨 생각이 들었는가”라고 묻자, 그는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박 변호사가 “범행을 계속 저지르고 용의선상에 오르지 않으니 범행에 더 대담해진 것인가”라고 캐묻자 이는 “지금도 왜 그런 생활을 했는지 정확하게 답을 낼 수 없다”며 “그냥 (범죄 현장에) 가 보면 그런 상황이 벌어져 있는 것이고, 계획을 하고 준비 있게 (범행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같은 장소에서도 살인 강도를 했다”고 언급했다.
“수사 부실…굳이 안 감추고 다녔는데 용의선상 안 올라”
이춘재는 당시 경찰 수사가 부실했었고 그 점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는 입장을 피력했다. 지난해 법무부 재소자 DNA 정보를 미제사건과 대조 수사하던 과정에서 이춘재는 화성연쇄살인사건 범인으로 특정됐다. 경찰은 처제 살인 사건으로 부산교도소에 수감 중인 이춘재의 DNA와 화성연쇄살인사건 현장에서 발견된 DNA가 일치한다고 확인했다.
이춘재는 이날 “저는 제가 안 잡히려고 증거 은폐하고 강력하게 시나리오 작성하고 하지 않아서 DNA 채취 후에도 크게 개의치 않았다”며 “경찰이 언젠가 찾아오겠지 생각했지만 오지 않았고, 안 오니까 ‘안 오나 보다’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춘재는 군 제대 직후 1986년 아동 강간 사건으로 경찰 조사를 받았으나 처벌받지 않았고, 화성연쇄살인사건 용의선상에서도 당시 빠져나갔다. 이는 “검문 당한적은 있었다. 그 당시 형사들이 거의 뭐 (화성 사건으로) 까이다시피 했기에(비난받았기에)”라며 “검문 과정에서 긴장하게 만든 특별한 상황은 없었다. 민증(주민등록증) 없어서 파출소 한 번 간 적 있었다”고 답했다.
이춘재는 자신이 용의선상에 오르지 않은 이유에 대해 “저도 아직도 그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제 주변에 난 사건인데, 제가 은폐하거나 숨기고 그러면서 돌아다닌게 아니고 수사가 진행됐다”며 “그러면 한 번쯤 의심을 받는, 그런 용의선상에 오를 수 있단 생각을 했는데 수사관 몇백명이 왔다갔다 했는데 딱 빠져나왔다”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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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이는 ‘살인의 추억’을 교도소에서 봤지만 영화에 대해 별 감흥이 없었다고 전했다. 이춘재는 “영화로서 봤고 별 감흥이 없었다”며 “사실과 다른 부분이 많이 있어서 신경 써서 보지 않았다”고 일축했다.
이춘재 8차 사건은 1988년 9월 16일 경기도 화성시 태안읍 진안리에서 박모(당시 13세)양이 자신의 집에서 성폭행을 당한 뒤 목이 졸려 살해된 사건이다. 당시 경찰은 윤모(53)씨를 범인으로 검거했다. 이후 윤씨는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감형됐다가 20년을 복역한 뒤 지난 2009년 가석방됐다. 이춘재가 자백하자 윤씨는 지난 1월 자신이 연루된 8차 사건에 대한 재심을 청구했다.
이춘재는 화성 사건 이후인 1994년 1월 청주에서 처제를 살해한 뒤 시신을 유기한 혐의로 체포됐다. 이후 1995년 7월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현재까지 부산교도소에 복역 중이다.
한편 경기남부지방경찰청은 지난 7월 최종 수사결과 발표를 통해 1986년 9월부터 1991년 4월까지 화성과 수원 등지에서 이춘재가 총 14건의 살인사건과 9건의 강간사건을 저질렀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