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과 이야기 나누고파”…살해당한 아내의 편지[그해 오늘]

“한국인과 비슷” 외형만 보고 데려온 19세 신부
시어머니·남편과 갈등…한 달 만에 “고국 그리워”
베트남 가려던 날 만취한 남편에 맞아 사망
사망 전날 남긴 편지엔 “많은 이야기 나누고 싶어”
  • 등록 2024-03-13 오전 12:01:00

    수정 2024-03-13 오전 12:01:00

[이데일리 강소영 기자] “하루라도 빨리 베트남으로 가고 싶다. 하지만 결혼 한 달도 안 돼 돌아온 나를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본 내용과 사진은 무관. (사진=게티이미지)
2008년 3월 13일, 코리안 드림의 꿈을 안고 왔다가 남편에게 맞이 숨진 베트남 여성 란(가명·당시 19세)의 일기가 언론에 공개됐다.

이는 당시 결혼이주여성의 인권 문제를 수면으로 끌어 올린 사건인 동시에 한국 농촌 사회에서 만연했던 국제 결혼의 민낯을 제대로 보여준 사건으로, 사망하기 전날까지도 이주여성인 란은 자신의 고국을 그리워하면서도 이루지 못한 코리안 드림의 꿈을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사건은 2006년 12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결혼정보업체를 통해 란은 남편 장모씨를 만났다. 장 씨는 한국 사람과 비슷한 외형이라는 이유로 란을 택했고 2007년 5월 16일 충남 천안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한국에서의 하루하루는 란에게 고된 시간의 연속이었다. 한국 도착 직후 시어머니의 못마땅한 시선과 말을 감내해야 했으며 말이 통하지 않는 나라에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할 수 없이 남편의 폭력 등 갈등을 겪어야 했다.

좋은 아내가 되고 싶었고 남편의 마음을 알고자 했지만 란의 결혼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결국 결혼 한 달 뒤 6월 26일 여권과 옷을 챙겨 베트남으로 돌아가려던 그녀는 술에 취해 귀가한 장 씨에게 맞아 사망했다.

경찰 조사 과정에서 란이 사망하기 전날 남편 장 씨에 “당신과 저는 매우 슬픕니다”로 시작되는 편지를 남긴 사실이 알려졌다.

그녀가 남긴 편지에는 “제가 한국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은 한국 사람들의 삶에 대해 알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한국에서도 부인이 기뻐 보이지 않으면 남편이 그 이유를 물어보고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 아닌가요. 그런데 남편은 왜 오히려 아내에게 화를 내는지, 당신은 아세요?”라며 자신의 심정을 토로했다.

또 “저는 당신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당신은 왜 제가 한국말을 공부하러 못 가게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요. 저도 다른 사람들과 같이 대화하고 싶어요”라며 “당신을 잘 시중들기 위해 당신이 무엇을 먹는지, 무엇을 마시는지 알고 싶어요. 당신이 일을 나가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건강은 어떤지 또 잠은 잘 잤는지 물어보고 싶어요”라고 적었다.

그러면서 “당신은 사소한 일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화를 견딜 수 없어하고, 이혼을 말하고, 당신처럼 행동하면 어느 누가 서로 편하게 속마음을 말할 수 있겠어요”라며 서운한 감정을 토로했다.

마지막으로 란은 “저는 당신이 저 말고 당신을 잘 이해해주고 사랑해 주는 여자를 만날 기회가 오기를 바래요. 당신과 전 서로 다른 나라 사람이어서 제가 한국에 왔을 때 대화를 할 사람은 당신뿐이었는데… 정말 더 이상 무엇을 적을 것이 있고 말할 것이 있겠어요. 당신은 이 글씨 또한 무엇인지도 모르고 이해하지도 못할 것인데요”라며 못다 한 이야기를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장 씨는 사건 발생 2개월 뒤 경찰에 검거됐다. 이후 란을 술에 취해 때려 숨지게 한 혐의로 구속기소 된 그는 1심 재판에서 징역 12년을 받았다. 장 씨는 형이 무겁다며 항소했지만 항소심 재판부 또한 원심 형량을 유지했다.

재판부는 A씨에 대한 질타와 더불어 한국 사회의 민낯에 대해 꼬집었다.

재판부는 “이 사건 범행은 결국 계획적이거나 미리 의도된 범행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피고인의 타인에 대한 배려의 부족, 피해망상적 사고경향 및 음주 중 폭력습벽에 기인한 것”이라고 봤다.

이어 “농촌지역을 중심으로 해 한국 남성과 제3세계 여성 사이의 국제결혼이 급격히 늘어가고 있는 이 시점에서, 이 사건은 우리로 하여금 국제결혼의 명암을 재조명해 보도록 하고 있다”며 “피고인은 그저 피해자가 한국인과 비슷하게 생겼다는 이유로 단 몇 분 만에 피해자를 배우자감으로 선택했고, 그 과정에서 피해자가 누구인지, 누구 집 자식인지, 무엇을 원하는지 아무도 알려준 바 없었고, 스스로 알고자 하지도 않았다”고 지적했다.

또 “단 한 가지 여자와 결혼을 한다는 것일 뿐, 그 이후의 뒷감당에 관해 진지한 고민이 없었다”며 “그것은 우리 사회의 총체적인 미숙함의 한 발로일 뿐”이라고 밝혔다.

재판부는 “노총각들의 결혼 대책으로 우리보다 경제적 여건이 높지 않을 수도 있는 타국 여성들을 마치 물건 수입하듯이 취급하고 있는 인성의 메마름. 언어 문제로 의사소통도 원활하지 않은 남녀를 그저 한 집에 같이 살게 하는 것으로 결혼의 모든 과제가 완성됐다고 생각하는 무모함”을 질타하며 “이 자리에서 우리는 21세기 경제대국, 문명국의 허울 속에 갇혀 있는 우리 내면의 야만성을 가슴 아프게 고백해야 한다”고 자성의 목소리를 냈다.

그러면서 “이역만리 땅에 온 후 단란한 가정을 이루겠다는 소박한 꿈도 이루지 못한 채 살해돼 19세의 짧은 인생을 마친 피해자의 영혼을 조금이라도 위무하고 싶었다”는 뜻을 나타냈다.

이데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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