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희 명인 "난방도 안 틀고 아끼며 모은 재산, 후학 양성 위해"

시가 200억원 상당 땅 기부
문화재청, 예능전수교육관 건립 계획
"오래전부터 생각…후배들 역량 발휘 도움되길"
  • 등록 2022-04-22 오전 12:12:19

    수정 2022-04-22 오전 6:46:25

[이데일리 이윤정 기자] “평생을 10원 하나 허투루 안 쓰고 검소하게 살았어요. 지금도 겨울에 난방을 틀지 않고 잘 때 전기장판 하나 깔고 잡니다. 그렇게 아끼며 모은 재산이지만 전통이 오롯이 전승되길 바라는 마음에 망설임 없이 국가에 내놨어요.”

4월 봄 더위가 이어지고 있는 날씨였지만 이영희(84) 가야금 명인의 집안에 들어서자 냉기가 느껴졌다. 평생 겨울에 난방조차 틀지 않고 살아왔다는 그는 여전히 버스를 타고 다니고, 하루에 만보 이상 걷기를 실천하고 있다.

그런 그가 평생 일궈온 시가 200억원 상당(공시지가 54억원)의 땅을 문화재청에 기부했다. 경기도 성남시 금토동에 위치한 5474㎡(1656평) 규모의 토지로 현재 이 명인의 집과 텃밭이 있는 곳이다. 문화재청은 이 명인의 뜻에 따라 이곳에 2027년까지 지하 2층, 지상4층 규모의 국가무형문화재 예능전수교육관을 건립할 계획이다.

21일 경기도 성남시 금토동 자택에서 만난 이 명인은 “오래전부터 생각해왔던 일”이라며 “예능 보유자들이 충분히 자신의 역량을 발휘하는데 도움이 되고 이곳에서 후학들을 양성할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한다”고 말했다.

이영희 가야금 명인(사진=문화재청).
예술학교 재직하며 예술세계 확장

평생 독신으로 살며 예인으로 살아온 이 명인은 1938년 전북 군산에서 태어났다. 가야금과의 인연은 중학교 시절 친구들과 함께 군산의 예인 김향초에게 승무·살풀이 등을 배우면서 시작됐다. 어머니께 승무를 배우고 싶다고 하니 당장 시장에 가서 장삼부터 직접 만들어주셨다고 한다. 이후 군산의 풍류객 이덕열에게 가야금과 단소·양금 등을, 가야금 명인 이운조에게 산조를 배웠다.

“당시 호남 지역에서 거둬들이는 모든 쌀을 일본으로 실어가면서 군산이 산업이 발달한 곳이었어요. 환갑이나 잔칫날만 되면 예인들을 불러다 놀고 즐기는 모습을 어려서부터 봐왔죠. 항상 그걸 보다보니 거기에 취한 거예요. 처음엔 승무를 배우다 점차 가야금에 매료됐죠.”

1958년 이화여대 사회학과에 진학한 뒤에도 가야금을 계속 배우고 싶었다. 국립국악원 사범이었던 김윤덕(1918∼1978) 명인을 소개받았다. 1960년 한일섭 문하에서 아쟁을 사사했고, 대학교 4학년 때인 1961년 전국신인방송국국악경연대회에 아쟁으로 출전해 1위 장관상을 받았다.

이 명인의 예술세계가 확장한 건 1962년 국악예술학교(현 국립전통예술고) 교사로 취업하면서부터다. 당시 학교에는 성금연(가야금)·한영숙(무용)·지영희(해금)·신쾌동(거문고)·박귀희(판소리) 등 명인과 명창 50여 명이 교사로 있었다. 이 명인은 1962년부터 1980년까지 교사로 재직하며 방과 후엔 당대 기라성 같은 예인들에게 개인 교습을 받는 기회를 얻었다.

이 명인은 “국악예술학교에 있는 동안 민속음악의 대가들에 둘러싸인 용광로 속에서 성장을 했다”며 “그곳에서의 경험이 아니었다면 오늘의 내가 없었을 것”이라고 회상했다.

“전통 외면받는 현실 안타까워”

일제시대에 태어난 그는 6·25전쟁과 4·19혁명 등 한국의 굵직한 역사현장을 모두 겪으며 살았다. 긴 세월 가야금과 함께하며 관두고 싶었던 적은 한번도 없었다고 한다.

“13살 때 6.25를 겪었어요. 눈 앞에서 사람이 죽는 것도 봤죠. 전쟁으로 폐허가 된 곳에서 다시 시작하며 검소하게 사는 게 몸에 밴 것 같아요. 가야금을 하면서는 깊이 파고들려고 하니까 힘들었던 것 같아요. 가야금은 몸을 풀고 근육이 이완된 상태에서 연주해야 해요. 가야금 연주에 스스로 만족할 때가 가장 기뻐요.”

1991년 김윤덕 명인의 뒤를 이어 국가무형문화재 가야금산조 및 병창 보유자가 된 그는 박귀희·김소희 선생 등의 후원에 힘입어 2000년부터 12년 동안 한국국악협회 이사장을 역임했다. 박귀희(1921∼1993) 명창은 국악의 대중화를 위해서는 체계적인 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국악예술고등학교에 기부하는 등 소리로 번 돈을 오롯이 교육에 바쳤다.

“기부를 결심한 것도 박귀희 선생과 같은 선배들의 모습에서 영향을 받았죠. 저 역시 후배들이 전통을 이어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자고 생각했어요. 전통이 외면받는 지금의 현실은 너무 안타까워요. 최근 국악인들이 설 무대가 사라지고 대학교의 국악과도 축소되고 있는데 우리의 전통은 예스러운 모습 그대로 올곧게 전승돼야 합니다. 그게 예능전수교육관을 만들고자 하는 가장 큰 이유예요.”

이영희 명인이 서울 금토동 자택에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는 모습(사진=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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